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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감사합니다”의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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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정진호 기자 중앙일보 기자
정진호 경제정책팀 기자

정진호 경제정책팀 기자

반말은 없었다. 예의는 있었고 감사를 잊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 당시의 아수라장 속에서도 신고자들은 그랬다. “진짜 사람 죽을 것 같다”는 절박함과 다급함이 묻어 있었지만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10월 29일 참사 당일 이태원파출소에 접수된 신고는 122건이다. 이중 오후 6시 34분부터 10시 11분까지 압사 위험을 알린 신고 녹취록 11건이 공개됐다. 녹음된 통화내용엔 비명과 고통의 신음이 담겼다. 눈에 들어온 말은 전화를 끊기 전 신고자의 한 마디다. 녹취록엔 신고자의 “감사합니다”는 말이 담겼다.

“한번 확인해볼게요” “경찰 출동할게요” 등 경찰의 답변에 신고자들은 감사하다고 말했다. “네. 부탁 좀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오후 8시 9분, 참사를 2시간여 앞둔 시간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난리가 났고, 다치고 있다며 현재 위치까지 정확히 말한 신고자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13일 서울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추모공간에서 시민들이 희생자를 애도하고 있다. [뉴스1]

13일 서울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추모공간에서 시민들이 희생자를 애도하고 있다. [뉴스1]

경찰을 무작정 비난할 의도는 없다. 수사 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현장에서 파출소 직원들은 적은 인력으로 최선을 다했을 터다. 112 신고는 서울경찰청 신고센터에서 접수받는데 여러 직원이 수도권 전역의 신고를 받다 보니 이태원 현장을 파악하기도 어려웠을 터다. 다만 30년 경력의 한 경찰 간부는 “같은 위치에서 유사한 신고가 계속 들어왔는데 지휘관이 적극적으로 상황 판단과 통솔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고 말했다.

신고자들이 마음 놓고 전화를 끊으면서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던 건 공권력과 경찰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다. 국가 기관에서 현장에 나와 이 위험한 상황을 정리해줄 것이라고 믿기에 다급한 상황에서도 112 신고 버튼을 눌렀고, 통화를 종료하면서 인사를 했을 것이다. 공권력에 대한 존중은 예의를 차린 신고 내용 곳곳에 묻어 있다.

경찰이 기억해야 할 건 믿음과 감사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시민들이 자신을 찾았다는, 음성으로 남은 진실이다. 경찰관 직무집행법을 보면 경찰관의 첫 번째 직무는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의 보호다. 극도의 혼잡 등 위험한 사태가 있을 때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법은 그 장소에 모인 사람에게 경고하거나 억류 또는 피난시킬 권한까지 부여했다. 누군가의 행동을 제약할 권한이 부여된 건 이들을 지키는 의무가 있어서다. 필요한 상황에서 그런 권한을 행사하지 않으면 직무상 의무 위반이라는 게 대법원 판례다.

뭣보다 ‘감사하다’며 구조를 기다린 현장의 청춘을 조롱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앞으로의 과제는 명확하다.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가 나를 구해줄 것이라는 시민 믿음에 보답해야 한다. 본보기 대상을 색출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감사 인사를 받을 시스템과 사람이 있음을 보여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