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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때도 '이런 사람' 보였다…군중 재난의 전조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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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가 일어나기 직전 한 외국인이 건물 외벽에 돋을새김 된 글자 간판 위로 기어올랐습니다. 군중을 벗어나려고 벽을 탄 건 이 사람뿐이 아닙니다. 비슷한 시각, 다른 외국인이 벽을 타는 모습도 보였죠.

이태원 사고 직전 벽을 타는 한 외국인의 모습. 이는 다가올 재난의 전조 현상이다. 사진 트위터 캡처

이태원 사고 직전 벽을 타는 한 외국인의 모습. 이는 다가올 재난의 전조 현상이다. 사진 트위터 캡처

돌발행동처럼 보이지만 군중 재난이 일어나기 전 흔히 나타나는 전조 현상입니다. 군중 압착 사고(crowd crush)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재난이지만 자연재해와 같은 전조 현상이 있죠. 쓰나미가 몰려오기 전 땅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다 빠져나가는 현상이 관찰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군중 재난은 큰 인명 피해로 이어지기 전, 여러 단계를 거칩니다. 단계별로 사람들의 특정한 행동 패턴이 관찰됩니다. 이번 이태원 사고 현장에서도 그러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군중 재난의 9단계와 전조 현상, 그리고 이때마다 취해야 할 적절한 조치는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군중 재난의 전조 현상

물이 물길을 따르듯 군중의 보행 동선도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습니다. 붐비는 지하철 역사 안, 사람으로 가득한 명동 거리 흐름도 위에서 보면 강물이 흐르듯 일정하죠. 개인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누구나 이 흐름을 따라 움직입니다.

하지만 군중 밀도가 증가하면 흐름이 붕괴하죠. 흐름이 무너지면 사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래서 군중 관리는 이 흐름을 계속 이어지도록 하는 걸 최우선 순위에 놓죠.

군중 역학 전문가이자 컴퓨터 사회과학자인 스위스 취리히연방공과대학 디르크 헬빙(Dirk Helbing) 교수에 따르면 자연스러운 흐름의 단계부터 군중 재난의 단계까지 상황은 총 9단계로 악화된다고 합니다.

단계별로 관찰되는 군중의 특정한 행동이 있습니다. 다음 단계의 전조 현상인 셈이죠. 군중 통제 인력은 이를 눈여겨보다 그 행동이 관찰되면 이에 대응하는 조치를 해야 합니다.

군중 관리의 마지노선 ‘3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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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단계에선 군중 밀도가 1㎡당 2~3명보다 적습니다. 군중 흐름은 정상적이며 위험도 낮습니다. 군중 관리를 위해선 이 흐름을 최대한 유지해야 합니다. 사람들 동선을 한 방향으로 통제해야 하죠. 또한 1분당 1m를 지나는 사람이 82명이 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시점이 1단계입니다. 어떤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더 붐비죠. 이유 없이 흐름이 멈추거나, 멈춘 사람들 때문에 병목 현상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때는 군중 관리 인력은 붐비는 지역에 사람들 유입을 통제해야 합니다. 보안 요원을 사고가 우려되는 지역에 배치하고 경찰과 구급 인력에 상황을 전달해야 하죠.

2단계에선 부분적인 정체가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붐비는 지역에서 사람들 유출이 활발하지 않습니다. 이대로 두면 군중의 축적과 이동 공간의 부족으로 심각한 상황이 생길 수 있죠. 군중과 적극적으로 소통해 유입하려는 사람들을 우회로로 안내해야 합니다. 들어오려는 사람을 길목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게 하는 건 정체를 악화시키고 그들을 조급하게 만듭니다. 경찰과 구조 인력을 붐비는 지역에 배치해야 합니다.

군중 사고는 매우 흔하게 발생할 수 있으며, 사상자도 쉽게 나오는 사고다. 따라서 초기 단계의 대응이 매우 중요하다. 가다 서다 하는 흐름이 반복되면 이내 상황은 악화할 수 있다. 사진 네덜란드 에인트호번대학교

군중 사고는 매우 흔하게 발생할 수 있으며, 사상자도 쉽게 나오는 사고다. 따라서 초기 단계의 대응이 매우 중요하다. 가다 서다 하는 흐름이 반복되면 이내 상황은 악화할 수 있다. 사진 네덜란드 에인트호번대학교

가다 서다 하는 일정한 리듬이 보이면 3단계로 진입한 겁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밀리는 모습이 관찰됩니다. 이제 지속적인 흐름은 붕괴했습니다. 밀집된 공간에서 빠져나가는 군중이 눈에 띄게 줄게 됩니다. 만약 비상 통로가 있다면 개방하고 우회로를 적극적으로 안내해야 하죠. 펜스와 같은 장애물이 있다면 제거해 길을 넓히고 충분한 수의 경찰과 구급 인력이 확보돼야 합니다. 이 단계부터 상황이 급속도로 나빠질 수 있기 때문에 경찰이 군중 통제 권한을 넘겨받아야 하죠.

헬빙 교수는 “이 단계부터 군중 지진(crowd quake)은 순식간에 닥칠 수 있다. 사람들이 옴짝달싹 못 하는 ‘군중 지진’ 단계에 이르면 개인적으로 벗어나려는 모든 노력은 거의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단계에 이르지 않도록 사전에 막아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4단계 넘어가면 수 분 내에 사망자 생길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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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단계부턴 사람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끼이고 이리저리 밀리죠. 이미 군중 밀도는 한계치인 1㎡당 6명을 넘어서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눌리거나 밀려 쉽게 다칠 수 있죠. 경찰이 즉시 지역을 통제하고 가능한 비상 계획을 가동해야 합니다. 군중과 소통해 적극적으로 밀집 지역을 탈출시켜야 하죠. 구급 인력은 인근에 도착한 상태여야 하며, 필요한 사람들에게 응급 처치를 제공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벽을 타고 오르거나 펜스를 넘는 행위가 보이면 5단계입니다. 군중을 통제하는 게 매우 어렵습니다. 군중을 탈출시켜야 하지만, 사상자 발생에도 대비해야 하죠. 병원에 추가적 인력 확보를 요청해야 합니다.

6단계에선 군중 지진이 발생한 단계로 비명이 여기저기서 들리며 “살려달라”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7단계는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하고, 8단계에선 사람들이 넘어선 사람 위로 기어 넘어가는 모습이 목격됩니다.

이 단계에선 사상자가 이미 나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근 병원은 대량 사상자에 대비해야 하며, 최악의 상황에선 국가 재난에 준하는 대응이 필요합니다.

군중은 3~4단계부터 패닉에 빠질 수 있습니다. 군중이 패닉에 빠지면 상황은 쉽게 악화하죠. 따라서 군중 관리는 2단계 이전에 머물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패닉에 빠진 군중은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패닉은 쉽게 전염된다. 밀집한 군중에서 패닉이 발생하면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패닉을 예방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군중의 밀도가 높아지지 않게 막는 것이다. 패닉은 군중 사고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진 LoveparadeDuisburg

패닉에 빠진 군중은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패닉은 쉽게 전염된다. 밀집한 군중에서 패닉이 발생하면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패닉을 예방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군중의 밀도가 높아지지 않게 막는 것이다. 패닉은 군중 사고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진 LoveparadeDuisburg

패닉에 빠진 군중은 ‘군집 행동’을 보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판단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따라 하려는 경향을 보이죠. 가까운 출구를 두고 먼 곳으로 달린다든지, 경찰 정보를 믿지 않고 주변 사람 추측을 믿기도 하죠.

군중이 밀집한 지역에서 압착 사고는 순식간에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독일ㆍ스위스에선 군중 관리 매뉴얼을 경찰에서 제작해 누구나 내려받을 수 있게 홈페이지에 게시해 둡니다.

독일은 5000명 이상 모일 수 있는 장소를 관리하기 위한 조례를 특별 제정했습니다. 건축물은 이를 따라야 하죠. 스위스는 경찰청 산하에 군중 관리부서를 따로 두고 있습니다. 스위스 취리히는 국가 최대 축제 취리히 패슈트 페스티벌을 위해 2013년 자체 앱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군중의 동선을 확인하고 실시간 모니터링해 사고를 막기 위한 것이었죠.

선진국에선 수십 년간 군중 사고를 연구해 이미 단계별 대응책과 사전 관리 방안을 상세히 수립했습니다. 예방이 가능한 사고란 말입니다.

헬빙 교수는 “수십 년간 세계에서 수많은 군중 재난(crowd disaster)이 일어났다. 과학자들은 사건들을 분석해 각 단계를 평가하고 위험을 줄이기 위한 수단을 만들어놨다”면서 “하지만 아직 이런 지식이 전 세계로 퍼지는 데엔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당시 이태원 현장에 있었던 경찰이나 군중도 위험의 단계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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