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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알 위에 쌓인 화산재 속 비밀…전국민 70%가 깔고 살았다 [e즐펀한 토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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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오후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산. 산등성이에 쌓인 돌무더기 사이로 기묘한 모양의 탑들이 보였다. 주변에 흩어진 평평한 구들장용 돌을 켜켜이 쌓은 석탑이다. 구들장은 한옥 난방설비인 온돌(溫突) 자재다. 아궁이에서 불길과 연기가 나가는 길(고래) 위에 돌을 깔아 열기를 머금게 한 원리다.

관광객 김정수(61·광주광역시)씨는 “어릴 적 방바닥에 깔았던 구들돌로 탑을 쌓은 게 흥미로워 자주 찾는다”며 “구들장 석탑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바위와 암석, 바다 풍광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산 정상부에 구들장용 돌을 쌓아올린 석탑들. 오봉산 내 21곳에 76개의 돌탑이 세워져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산 정상부에 구들장용 돌을 쌓아올린 석탑들. 오봉산 내 21곳에 76개의 돌탑이 세워져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산비탈엔 ‘갈지자’ 소달구지길 ‘아찔’

오봉산은 한때 전국에서 사용되는 구들장의 70%를 캐내던 채석 산지다. 70년대 말까지 국내 곳곳에서 돌을 사 갔지만 보일러와 아파트문화가 확산하면서 사양산업이 됐다. 문화재청과 보성군은 1930년대부터 1980년 초까지 오봉산에서 구들장이 채석된 것으로 본다. 채석장 상층부나 산 정상에 세워진 돌탑은 오봉산 내 21곳에 76개가 세워져 있다.

석탑이 세워진 정상부에서 산등성이 쪽을 살펴보면 ‘갈지(之)’자 모양의 여러 길이 보인다. 과거 오봉산에서 캔 구들장을 운반하던 소달구지길이다. 해발 343m 산에 거미줄처럼 이어진 길에서는 과거 채석 때 사용된 도구와 장비가 숱하게 발견됐다. 45도 경사로에서 1t 정도 돌을 싣고 내려올 때 쓰던 철제 브레이크와 소 짚신 등도 나왔다. 산림청은 지난해 12월 오봉산 우마차길을 ‘국가 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했다.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산 산등성에 있는 ‘갈지(之)’자 모양의 길들. 과거 오봉산에서 캔 구들장을 운반하던 소 달구지길이 해발 343m 산에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산 산등성에 있는 ‘갈지(之)’자 모양의 길들. 과거 오봉산에서 캔 구들장을 운반하던 소 달구지길이 해발 343m 산에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전남 보성군에 세워진 구들장을 싣고가는 소달구지 조형물. 프리랜서 장정필

전남 보성군에 세워진 구들장을 싣고가는 소달구지 조형물. 프리랜서 장정필

칼바위·원효 대사 설화…국가 산림문화자산

오봉산은 곳곳에 있는 구들장 채석현장 외에도 이색적인 풍광과 볼거리가 많다. 정상부에는 돌탑과 함께 산의 상징인 칼바위·구들장바위·풍혈 등이 있다. 칼바위는 약 30m 높이 바위 겉면에 마애불상이 새겨진 국가 산림문화자산이다. 통일신라 때 원효 대사가 오봉산에서 불도를 닦는 모습을 형상한 것이라는 설화도 있다.

구들장 채석지는 중생대 백악기 때 여러 차례 화산 폭발로 생긴 지형이다. 산 정상과 능선 전역에 화산재가 쌓이면서 생긴 응회암이 산재해 있다. 암석은 층층이 틈이 난 층상절리(層狀節理) 형태여서 구들장을 뜨기에 적합하다. 응회암은 강도가 높고 열전도율이 높아 호남은 물론이고 서울·경기·부산 등지로 실려 갔다.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산 정상부에 있는 칼바위. 약 30m 높이의 바위 겉면에 마애불상이 새겨진 산림청의 국가 산림문화자산이다. 통일신라 때 원효 대사가 오봉산에서 불도를 닦는 모습을 형상한 것이라는 설화도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산 정상부에 있는 칼바위. 약 30m 높이의 바위 겉면에 마애불상이 새겨진 산림청의 국가 산림문화자산이다. 통일신라 때 원효 대사가 오봉산에서 불도를 닦는 모습을 형상한 것이라는 설화도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백악기 화산폭발 지형…응회암 ‘층상절리’

오봉산 응회암은 ‘맥반석’이라 불리는 강도가 높고 가벼운 성분이 많이 함유돼 있다. 토양 입자 사이의 틈인 공극(孔隙)이 많아 따뜻한 공기를 오래 품을 수 있다. 평평하면서도 얇지만 오랜 시간 불과 연기에 닿아도 깨지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리신호 충북대 명예교수는 “오봉산 구들장 산지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온전히 남아 있는 귀중한 문화재”라며 “현재 구들장 대부분은 현무암 계열의 수입 돌을 사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존하고 생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산 정상부에 구들장용 돌을 쌓아올린 석탑들. 오봉산 내 21곳에 76개의 돌탑이 세워져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산 정상부에 구들장용 돌을 쌓아올린 석탑들. 오봉산 내 21곳에 76개의 돌탑이 세워져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전통 한옥의 온돌과 구들장 구조. 사진 보성군

전통 한옥의 온돌과 구들장 구조. 사진 보성군

오봉산 채석지, 광산 최초 국가문화재 등록

문화재청은 지난 4월 27일 오봉산 구들장 채석지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광산중 국가등록문화재가 된 것은 국내 첫 사례다.

문화재청은 온돌문화 핵심 재료인 구들장을 채취했던 곳이라는 점에서 근대 문화유산으로 보존가치가 있다고 봤다. 전통 온돌 산업의 발전 상황을 보여주는 채석장·운반로 등 유구가 잘 남아있는 점도 지정을 뒷받침했다. 온돌은 2018년 3월 국가무형문화재 제135호에 등재된 전통 문화유산이다.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산에 있는 ‘갈지(之)’자 모양의 길들. 과거 오봉산에서 캔 구들장을 운반하던 소 달구지길이 정교한 석축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사진 보성군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산에 있는 ‘갈지(之)’자 모양의 길들. 과거 오봉산에서 캔 구들장을 운반하던 소 달구지길이 정교한 석축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사진 보성군

공룡알 위에 화산재가 쌓여 만든 응회암층

전문가들은 오봉산 응회암층이 공룡이 번성했던 백악기 때 만들어졌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1998년 9월 발견된 공룡알 지층 상층부에 응회암이 형성된 구조여서다. 조사 결과 오봉산은 공룡이 알을 낳은 퇴적층 위에 화산재가 쌓여 만들어진 것으로 분석됐다. 공룡알이 발견된 득량면 선소해안과 오봉산은 2.5㎞ 거리다.

천연기념물 제418호인 비봉리 화석지는 국내 최대 규모의 공룡알 산란지다. 발굴 당시 비봉리에서는 약 1억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공룡알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득량만 해안 3㎞를 따라 응회질의 사질이암층에서공룡알 200여개, 알둥지 17개 등이 나왔다.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된 공룡알과 둥지, 초식공룡인 조각류의 골격 등은 백악기 환경을 보여주는 자료다.

전남 보성군 득량면 비봉리 공룡알 화석지에 있는 공룡알 둥지. 프리랜서 장정필

전남 보성군 득량면 비봉리 공룡알 화석지에 있는 공룡알 둥지. 프리랜서 장정필

한국 이름의 첫 공룡 ‘코리아노사우루스보성엔시스’

비봉리에서는 2003년 5월 공룡 골격 화석이 발견되면서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한국공룡연구센터(소장 허민) 발굴팀은 2010년 11월 8500만년 전 한반도에 살았던 토종 공룡을 복원해 공개했다. 세계 최초로 한국 이름을 딴 공룡 ‘코리아노사우루스보성엔시스’가 탄생한 순간이다.

학명에 한국 이름이 최초로 들어간 코리아노사우루스 보성엔스시. 중앙포토

학명에 한국 이름이 최초로 들어간 코리아노사우루스 보성엔스시. 중앙포토

작년 7월 국제학술대회…국제적 가치 공인

역사로만 남아있던 보성 구들장이 국제적 명성을 얻은 것은 지난해 7월로 올라간다. 보성에서 열린 ‘오봉산 구들장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문화재적 가치가 새롭게 조명됐다. 국제온돌학회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오봉산 채석지가 역사적·입지적·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했다. 정교한 석축방식을 사용한 구들장 운반로와 채석·운반 장비 또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서만철 전 공주대 총장은 “오봉산 채석지는 수천년간 이어져 온 온돌문화의 뚜렷한 증거”라며 “우리 민족의 온돌 난방체계는 동북아시아 등 다른 문화권에도 영향을 끼쳐왔다는 점에서 세계유산으로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전남 보성군 득량면 비봉리 공룡알 화석지에 있는 공룡알과 공룡 조형물. 프리랜서 장정필

전남 보성군 득량면 비봉리 공룡알 화석지에 있는 공룡알과 공룡 조형물. 프리랜서 장정필

전문가 현장조사, 채석 참여자 구술·채록

앞서 보성군은 2021년 1월 타당성 조사를 시작으로 구들장의 역사와 우수성을 조명해왔다. 수십 차례에 걸친 전문가 현장조사와 구들장 채석 참여자들의 구술·채록 등을 통해 체계적인 정리 작업도 했다. 지난 5월에는 국가문화재 등재를 기념해 ‘온기(溫氣) 품은 돌, 오봉산 구들장’을 주제로 특별전도 열었다.

김철우 보성군수는 “국가문화유산 품격에 맞는 구들장 채석지 보존·활용 방법을 모색하고, 세계 문화유산 등재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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