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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업·자연 공존 공간, 혁신도시 경쟁력 높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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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3호 18면

도시 살리는 문화시설

LG아트센터 서울 전경.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타원형 터널 ‘튜브’를 사이에 두고 아트센터와 디스커버리랩이 자리한다. [사진 LG아트센터 서울]

LG아트센터 서울 전경.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타원형 터널 ‘튜브’를 사이에 두고 아트센터와 디스커버리랩이 자리한다. [사진 LG아트센터 서울]

지난달 조성진과 런던심포니의 협연으로 전국의 클래식 팬덤을 강서구 마곡동에 집결시키며 화려하게 문을 연 LG아트센터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22년간 공연예술의 메카 역할을 해온 LG아트센터가 마곡의 R&D단지 LG사이언스파크의 공공기여시설로 이전해 오며 명칭을 바꿨다. 서울시에 기부채납되어 시민이 주인이 됐기 때문이다. 개관 공연 수익금 약 3억원도 신진아티스트 지원을 위해 한국메세나협회에 전액 기부될 예정이다.

지난 5일 오후엔 이곳에 동네 초등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공연이 아니라 공간 때문에 왔다.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축을 뜯어보는 ‘건축학교-My Own Arts Center’라는, 오직 여기서만 받을 수 있는 수업을 위해서다. LG아트센터 서울은 서울식물원과 LG사이언스파크 사이에 안도 다다오가 자연과 산업, 문화를 촉매하는 기능을 부여한 새로운 랜드마크 건축이다. 주변 건축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비스듬하게 세워진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고래 뱃속 같은 ‘튜브’와 거대한 콘크리트 곡면이 인사하듯 기울어진 ‘게이트 아크’, 지하철역에서 지상 3층까지 이어지는 100m 산책길 ‘스텝 아트리움’ 등을 거닐며 낯설고도 감각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아트 라운지·루프탑 등 곳곳 발길 북적

1335석 규모의 대극장 ‘LG시그니처홀’. [사진 LG아트센터 서울]

1335석 규모의 대극장 ‘LG시그니처홀’. [사진 LG아트센터 서울]

“건물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찾은 다양한 모양을 그려보세요.”“도형들이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관찰해 보세요. 사람들은 이 도형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나요.”“오늘 탐색한 공간에 어울리는 새로운 기능을 상상해 볼까요.”

이날 모인 30명의 어린이는 세계적인 건축가의 건축철학을 발로 뛰며 체득한 후 그 인사이트를 자신의 창의력으로 연결해 수수깡, 휴지심 같은 재료들로 자신만의 건축까지 완성했다. 송화초등학교 4학년 이유준 군은 “공간마다 각각 다른 촉각을 느낄 수 있어서 신기했다. 둥근 튜브와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를 보고 수영장과 러닝머신의 모습이 떠올라 운동하는 공간을 만들어 봤다”고 했다. 아버지 이철 씨는 “인근 주민이라 교육 프로그램이 생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이에게 건축가가 어떤 관점에서 보고 생각하는지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서 데려왔다”고 말했다.

예술과 기술을 촉매하는 공간 ‘튜브’. 브릿지에서 스튜디오 스와인의 ‘포그 캐논’이 뿜어져 나온다. [사진 LG아트센터 서울]

예술과 기술을 촉매하는 공간 ‘튜브’. 브릿지에서 스튜디오 스와인의 ‘포그 캐논’이 뿜어져 나온다. [사진 LG아트센터 서울]

이 건물을 함께 쓰는 인공지능 교육센터 LG디스커버리랩도 12일 개관에 앞서 시범운영 중이었다. 오전 10시부터 중학생 40여명이 자율주행과 언어지능, 시각지능 등 3개 클래스로 나뉘어 AI 로봇을 실제로 작동하면서 실습교육을 받았다. LG가 현업에서 활용하고 있는 최신 기술을 적용해 4년간 개발한 독자적인 교육 프로그램으로, 인공지능이 가까운 미래를 어떻게 바꿀지 통찰해 보는 시간이다. 교육에서 배운 기술이 적용된 미래를 구현해 놓은 인공지능 전시장 옆 오픈랩에서는 12일 개관을 기념해 인근 LG사이언스파크에서 일하는 연구원들의 인공지능 토크 콘서트가 열린다. 청소년들은 기술의 변화가 가져올 미래를 상상하며 진로 탐색을 해볼 수 있다.

자율주행 로봇지능 프로그램에 참여한 청라중 2학년 김태하 군은 “원래 자율주행에 관심이 있었는데 라이다 센서를 이용한다는 건 처음 알았다. 직접 학습을 시켜보니 인공지능 원리가 잘 이해됐다”고 했다. 영동중 2학년 강필준 군은 “마지막 자율주행 매핑 실습 때 실수로 로봇을 들어 올리는 바람에 실험이 망했는데, 오히려 실수 때문에 원리를 깨닫게 됐다”면서 “이 기술을 사용한 자율주행 자동차를 꼭 이용하고 싶다”고 했다.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 ‘건축학교’. [사진 LG아트센터 서울]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 ‘건축학교’. [사진 LG아트센터 서울]

LG아트센터 서울 건축의 시그니처인 80m 길이 터널길 ‘튜브’를 사이에 둔 ‘아트센터’와 ‘디스커버리랩’이 각각 문화예술 교육과 인공지능 교육 프로그램 가동을 동시에 시작했다. 음악, 건축, 무용 등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구경꾼을 넘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인데, 첫 시즌 강좌들은 오픈 당일 모두 마감됐을 만큼 반응이 뜨겁다. LG아트센터가 단순 공연장을 넘어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마곡의 문화 인프라가 된 셈이다.

다소 생소한 지명인 마곡은 지금 대한민국 혁신 산업의 중심으로 주목받고 있는 신도시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허허벌판 농지였지만, 마곡도시개발 사업이 시작되고 2017년부터 국내 최대 융복합 연구개발 단지 LG사이언스파크가 들어서면서 달라졌는데, LG아트센터 서울 개관은 또 하나의 변곡점이 될 전망이다.

한 도시의 랜드마크 건축물이 문화 인프라를 갖춤으로써 도시경쟁력을 높이는 ‘빌바오 효과’ 측면에서다. 조선업·제철업으로 먹고살던 스페인 빌바오가 산업사회 쇠퇴로 먹거리를 잃었지만, 1997년 구겐하임 미술관 개관 이후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거듭난 데서 유래한 말이다. 구겐하임 빌바오의 지역사회 재생 역할이 주목받은 이후 세계의 미술관들은 전시를 넘어 대중의 소통 공간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했고, 접근성을 높이고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등 사람들의 상호작용에 방점을 찍게 됐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개관 후 번창

디스커버리랩의 인공지능 교육. [사진 LG아트센터 서울]

디스커버리랩의 인공지능 교육. [사진 LG아트센터 서울]

LG아트센터 서울의 주인공도 사람들이다. 12월 중순까지 아크람 칸, 요안 부르주아, 파보 예르비 등 세계 거장급들을 초청한 개관 페스티벌 프로그램이 빼곡하지만, 주말 방문객들은 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온 부모들이나 건축을 감상하러 온 가족 단위가 많았다. 각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셀프 투어를 하고 있는데, 공간 곳곳에 부착된 QR코드를 찍으면 배우 박해수의 내레이션으로 건축가의 디자인 콘셉트와 비하인드 스토리가 들려온다.

건축의 핵심도 공연장이 아니다. 첨단 음향시설을 갖춘 ‘LG 시그니처 홀’, 가변형 블랙박스 ‘U+스테이지’의 입구는 오히려 숨겨져 있고, 튜브와 게이트 아크, 스텝 아트리움이라는 골조를 따라가며 만나는 풍경들과 전시공간인 아트 라운지, 전망이 탁트인 루프탑, 카페 등 공간마다 발길을 붙든다. 강서구 주민 권승자 씨는 “10년 넘게 부근에 살았는데 최근 5년 새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발산역과 마곡역 사이 맛집도 많이 들어서고 서울식물원도 생겨서 활력이 돈다. LG아트센터 서울도 공원 산책하다 들렀는데 웅장하고 멋져서 자꾸 발길이 간다”고 말했다.

창조도시 이론가이자 ‘창조계급’ 개념의 창시자인 리처드 플로리다 토론토대 교수에 따르면 창의적인 인재들이 이동하는 요인은 커뮤니티, 도시의 미적공간, 생활환경시설 등 지역의 환경적 요소들이 결정한다. 세계에서 기술혁신이 가장 많이 일어난 뉴욕과 실리콘밸리 인근에는 다양한 문화예술 인프라가 있고, 산업 발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사람들의 생각을 선도할 수 있어야 혁신의 중추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뮤지엄 등 창의적인 사람들이 교류할 수 있는 공간에서 아이디어와 지식, 가치, 문화 등 소프트파워를 키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LG아트센터 서울이 ‘창조계급’을 기르는혁신도시 플랫폼으로 기능하게 될까. 공공 교육 프로그램으로 미래 관객인 초중학생을 적극 끌어들이고, 방문객이 스스로 아름다운 건축 자체를 음미하게 유도하며, 예술과 기술을 한 지붕 아래 동거시키는 데서 가능성이 엿보인다. LG공익재단 양재훈 대표는 “LG가 구축한 혁신 인프라를 통해 마곡이 5년 만에 ‘서울의 새로운 핫플레이스’라 불릴 만큼 발전했다고 자부한다”면서 “앞으로 아트센터와 디스커버리랩의 운영을 통해 지역사회에 더욱 기여하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웃집 토토로’ 배경 일본 시골마을, 문화시설 들어서자 침체 벗어나

카도카와 무사시노 뮤지엄. 유주현 기자

카도카와 무사시노 뮤지엄. 유주현 기자

일본의 사이타마현 도코로자와시의 사쿠라타운도 문화예술 인프라가 도시 경쟁력이 된 사례다.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의 배경인 시골마을이자 인구감소로 침체일로에 있던 도쿄 외곽의 베드타운이 요즘 가장 힙한 도시가 됐는데, 카도카와 출판사와 도코로자와시가 민관 공동 프로젝트로 2020년 11월 복합문화공간인 사쿠라타운을 열면서다.

급변하는 출판 환경에 대처할 디지털 기술을 갖춘 새로운 업무시설 건설을 모색하던 카도카와가 도코로자와시 정화조 부지를 매입하면서 산업과 도시의 윈윈 모델 ‘쿨재팬 포레스트 구상’이 시작됐다. 주목할 것은 콘텐트다. 이곳의 랜드마크는 세계적 건축가 쿠마 켄고가 디자인한 거대한 운석 모양의 건축 ‘카도카와 무사시노 뮤지엄’으로, 만화, 애니메이션 등 대중문화의 산실인 카도카와의 콘텐트를 활용해 ‘일본 최대 팝컬처 발신기지’를 자처하고 있다.

서적 3만권으로 채운 책장 극장. 유주현 기자

서적 3만권으로 채운 책장 극장. 유주현 기자

2만장의 화강암 타일로 외관이 마감된 웅장한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360도로 펼쳐지는 높이 8m 책장에 3만권의 책이 빼곡한 ‘책장 극장’을 비롯해 2만5000권의 만화와 그래픽 노블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도서관과 애니메이션 뮤지엄, 아트갤러리가 각층을 채우고 있다. 또 다른 건축인 재팬 파빌리온은 마치 오사카성 같은 전통 건축물을 미니멀하게 디자인한 외관 안에 라이브 공연과 e스포츠 대회 등을 개최할 수 있는 이벤트홀을 갖추고 플레이어와 청소년들이 교류하는 공간으로 쓰고 있다.

향후 첨단 산업을 끌어들여 ‘도코로자와판 실리콘밸리’까지 꿈꾼다는 사쿠라타운 건설의 예상 경제 파급효과는 연간 311억 5126만 엔(한화 약 3100억 원). 기업이 건설하는 시설을 중심으로 행정이 환경을 정비하면서, 주변 벚꽃길과 일본인들의 영적 공간인 신사까지 콘텐트화해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자연과 문화, 산업이 합체해 도시를 살리고 있는 앞선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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