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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성평등’  표현 삭제, 보편적 인권 어긋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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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3호 30면

지난 9일 교육부가 발표한 새 교육과정에서 6·25 ‘남침’ 사실을 명시하고, ‘자유민주주의’ 표현을 넣은 것은 바람직하다. 문재인 정부 때 임명된 연구진이 만든 초안에선 2가지 모두 빠져 있었다. ‘남침’을 삭제해 북한이 침략 주체란 사실을 흐렸고, ‘자유주의’가 빠진 ‘민주주의’는 자칫 다수결 만능의 근거로 쓰일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교육부가 이를 바로잡는다며 ‘성평등’과 ‘성소수자’ 용어까지 제외한 것은 유감이다. 도덕에서 ‘성평등’을 삭제한 뒤 ‘성에 대한 편견’이란 표현을 넣었고, 통합사회에서 ‘성소수자’를 ‘성별 등으로 차별받는 소수자’로 대체했다. 교육부는 “청소년기에 성 정체성을 혼란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고 설명했다.

교육과정엔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교육의 목표와 내용이 담겨 있다. 향후 교과서의 집필기준과 교실수업의 가이드라인이 된다. 아동·청소년이 건강한 의식을 가진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하는 자양분 역할을 한다. 궁극적으로는 그 나라의 시민의식 수준과 국격을 엿볼 수 있는 참고자료가 된다.

교육과정에 ‘남침’ ‘자유민주주의’ 적시
‘성평등’은 세계인권선언의 핵심 기본권
국가교육위, 12월 말 최종고시 때 시정해야

그런 의미에서 각종 행사 때마다 인류의 보편 가치를 강조해온 윤석열 정부가 성평등 표현을 삭제한 것은 아이러니다. 1948년 제정된 세계인권선언은 전문에서 ‘남녀의 평등한 권리(equal rights of men and women)’를 명시하고 있다. 인권선언에 참여한 많은 나라가 성평등을 핵심 기본권으로 여긴다.

성평등 표현을 없애고 ‘성에 대한 편견’이라고 쓴 것은 근대 민주주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온 인권 담론을 후퇴시킨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치우친 생각’이란 뜻의 편견은 단지 개인·집단의 의식 상태를 설명하는 용어다. 하지만 평등은 단순한 사전적 의미를 넘어 인류의 보편적 가치 지향과 행동 촉구를 내포한다.

대통령이 즐겨 쓰는 자유도 마찬가지다. 표현의 자유는 ‘표현이 자유롭다’고 현상을 설명한 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억압 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당위를 담고 있다. 이를 ‘표현에 대한 억압’으로 바꿔 쓸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정치적 이유로 인류의 보편 가치를 퇴색시켜선 안 된다.

교육과정에 성평등을 명시하는 것이 여성가족부 폐지와 엇박자라고 계산했을 수 있다. 문재인 정권의 여가부가 성범죄 가해자를 감싸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편향된 행동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평등 정책을 후퇴시키고 교육과정에서조차 표현을 없애는 것은 교각살우가 될 수 있다.

인권선언은 교육의 목표를 “이해와 관용을 증진시키는 것(shall promote understanding and tolerance)”이라고 했다. 이에 따른다면 성소수자를 배제할 게 아니라, 개방적 관점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 일각의 우려대로 성소수자라는 표현이 있다고 해서 동성애를 조장하는 방향으로 가르칠 교사는 없을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자유주의의 본질은 “소수자의 이익과 발언도 다수에게 존중받는 것”(자유론)이다. 다수결이라는 의사결정 방식의 특성상 다수의 횡포로 흐를 수 있는 민주주의를 자유주의가 보완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자유주의를 강조하는 정부가 성평등, 성소수자 같은 보편적 표현을 못 쓰게 한 것은 이율배반이다.

새 교육과정은 국가교육위원회 심의를 거쳐 12월 30일 최종 고시된다. 이화여대 총장 출신인 이배용 위원장과 20명의 위원들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인류가 쌓아온 보편적 인권 신장의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결정을 내리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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