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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두 대통령 법 인식이 주는 피로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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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논설위원

고정애 논설위원

반려동물을 선물받은 정상 중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있다. 2005년 게오르기 파르바노프 불가리아 대통령이 생후 2개월 된 토종견 ‘발칸’을 건넸다. 부시 부부가 애견인인 걸 염두에 두고서였다.

문 전 대통령, 반려견 보내며 법 탓 #윤 대통령, 장관 질타에 "잘못했나" #정치·상식 대신 법 우선은 잘못

미국 대통령도 선물은 받지만 소유는 못 한다. 선물 대부분이 곧장 국립기록보관소 창고로 직행하곤 한다. 당시 기준으로 305달러 이상은 안 됐다. 그렇다면 강아지는? 발칸의 운명이 드러난 건 그로부터 1년 뒤였다. 그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먼저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의 직원이 국립기록보관소에 연락했다. “개를 가지러 올 수 있나요?” “도자기로 만든 개요?” “아뇨. 진짜 개요. 귀여워요.” “살아 있는 동물은 안 받아요. 귀엽든, 안 귀엽든.”

부시 대통령 부부는 이미 반려견이 두 마리라 더 이상은 곤란했다. 자신들의 텍사스 목장도 생각했으나 너무 고온 지역이라 문제였다. 결국 워싱턴 인근에 사는 불가리아계 미국인 부부에게 선물했다. 이를 위해 재무부에 강아지값으로 430달러를 냈다고 한다.

발칸 얘기를 왜 하는지 다들 알 것이다. 2주 전 이 지면에 ‘문 대통령 앞에 쌓이는 질문’을 쓰며 문재인 전 대통령의 풍산개 때문에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시행령이 바뀌었고, 또 바뀔 수도 있다고 전했다. 3월 개정에선 풍산개를 대통령기록관이 아닌 다른 기관에 위탁할 수 있도록 했고, 6월 입법예고에선 예산 지원 근거도 마련했다고 말이다.

 2018년 10월 12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가진 영국의 공영방송 BBC와 인터뷰에서 로라 비커 진행자에게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선물받은 풍산개 곰이와 송강이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2018년 10월 12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가진 영국의 공영방송 BBC와 인터뷰에서 로라 비커 진행자에게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선물받은 풍산개 곰이와 송강이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더 쓰려 하지 않았는데, 문 전 대통령의 ‘법상’ 입양이 불가능했다는 주장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현행법에선 외국에서 받은 선물은 원칙적으로 국가 소유이긴 하다. 그렇다고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이 동물까지 상정했을까. 법 목적이 보존인 만큼 “살아 있는 동물은 안 받는다”는 미 국립기록보관소의 입장이 합리적이다. 설령 대통령기록관이 풍산개도 대통령기록물이라고 고집한다 한들(그럴 리 만무하지만), 문 전 대통령에겐 얼마든 ‘반려동물=대통령기록물’이란 불합리를 해소할 힘과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4년간(개의 일생으로 보면 3분의 1이다)을 ‘가족’이라고 알리곤, 제도는 바로잡지 않았다. 퇴임 임박해서야 ‘대통령기록물이니 이관하겠다’고 했다가 비난을 받자 양산으로 데려갔고 금전적 지원을 안 해준다고 ‘위탁관리’를 관뒀다. 문 전 대통령이 잔뜩 법 운운했지만, 그저 키우지 않기 위한 핑계로 보이는 이유다.

문 전 대통령 재임 기간 종종 느꼈던, 정체성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정치인보단 법조인이란 걸 다시금 절감한다. 상식으로 판단해야 할 때, 법률용어를 들이대며 자기방어에 치중하는 걸 보면서 말이다. 이번에도 “정치의 영역에 들어오기만 하면 이처럼 작은 문제조차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흙탕물 정쟁으로 만들어버리는지”라고 비난했지만 정작 문 전 대통령부터 잘못했는데 법 탓을 했다. 500여 년 전 피렌체의 한 지식인이 “산더미 같은 법률 서적이 그저 특정 사건을 자신의 이해에 맞추기 위한 법률가들의 도구”란 질타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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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은 나은가. 이태원 참사를 비롯해 최근 이런저런 논란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그 역시 법적 마인드가 강하며, 특히 정치적ㆍ도의적 책임보단 처벌 가능성만 중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의 경질론을 두고 “잘못한 게 뭐냐”고 감쌌다니 더 그렇다. 이 장관은 경찰이 자기보호를 위해 팩트를 뒤섞곤 한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순진했다. 참사 초기 대응을 어렵게 한 치명적 실수였다. 윤 대통령은 그런데도 경찰만 뭐라는 듯 보인다. 주변에선 “의무가 없는데 책임을 물을 수 없지 않으냐”(유상범 국민의힘 의원) 같은 소리나 하고 있다.

상투적일 수 있지만, 너무나도 옳은 얘기여서 다시 인용한다. “정치가는 자기 책임을 거부할 수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할 수도 없으며 또 해서도 안 된다.”(막스 베버)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때 법 논리를 들이대는 두 대통령을 보는 건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