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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지선의 살아내다

7시간 22분 26초, 끝까지 포기는 없었다…그녀가 전한 '기적의 맛'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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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주원 기자

그래픽=김주원 기자

내가 사골처럼 우려먹는 이야기가 있다. 얼마 전 출간한 새 책에도 무려 두 챕터에 걸쳐 쓴 이야기이다. 그래도 너무 짧지 않고 7시간 22분 26초 동안 일어났던 일이라 수십 번을 우려도 여전히 영양가가 좀 나온다. 그리고 이번에도 한 번 더 이야기를 우려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마라톤에 도전했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꼭 깔아야 할 밑밥이 있다. 나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 꼭 해야 할 일 때문에 몸을 일으켜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20대 때 교통사고로 화상을 입고 지금까지 40여 차례의 피부이식 수술을 한 탓에 몸을 움직이는 게 원활하지 않고, 이식한 피부에 땀구멍이 없어 체온조절이 수월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고 전에도 운동을 즐겼던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리 안타깝지는 않다.

이런 사람에게 마라톤에 참가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한 건 내가 홍보대사로 함께하는 푸르메재단이다. 이 재단은 지난 2005년 국내 최초로 장애를 가진 어린이를 위한 재활병원을 짓겠다는 취지로 시작했다. 당연히 수익은 나지 않아서 돈을 벌려는 이라면 이런 일을 시작조차 하지 않겠지만,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했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중요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집중적으로 재활치료를 받아 걸을 수 있다면, 혹은 말할 수 있다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라는 걸 알기에 나도 17년째 함께 하고 있다. 마침 당시 내가 유학 중이던 뉴욕에서 열리는 뉴욕국제마라톤대회에 푸르메재단 관계자들이 장애인 마라토너들과 참가하게 됐고, 나에겐 10km 정도만 같이 뛰어 주길 제안했다. 뭘 모르면 용감해진다 했던가. 기꺼이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마라톤대회를 불과 며칠 앞두고서야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꾸준히 훈련과 연습을 거듭해 마라톤에 참가한다는 걸 알게 됐다. 부랴부랴 동네 한 바퀴를 걸어보니 나의 한계는 딱 8km라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하루 전날에야 마라톤 할 때는 몸에 딱 붙는 옷을 입는다는 걸 알게 돼서 급히 운동복도 구입했다. 새 운동복에 뉴욕 지하철 카드를 소중하게 넣어 놓고 (나는 조금 걷다가 지하철을 탈 계획이었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4만명의 마라토너 사이에서 마라톤 시작을 기다렸다.

맨 처음에는 한국에서 온 장애인 마라토너들과 함께였다. 시작 구간부터 오르막길이라 정말 난감했다. 내 느린 속도 탓에 다른 분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제발 나를 두고 가시라, 실력대로 달려서 좋은 기록을 내시라”고 애원했다. 그중 한 분이 나랑 같은 시기에 같은 병원 중환자실에 있었던 김황태 오빠였다. (김황태님은 전기 화상으로 양팔을 잃었지만 건강한 두 다리로 마라톤에 도전해 3시간 미만의 기록을 가진 마라토너다. 지금은 철인3종경기에 도전하고 있다) 황태 오빠가 그때 헤어지면서 말했다. “지선아, 중환자실에 있을 때보다 힘들지 않을 거야. 너 할 수 있을 거야.” 전쟁터 같았던 곳에서 살아나온 나의 전우(戰友)가 뜨거운 눈빛으로 건넨 이 말은 벌써 수년이 지났지만 돼낼 때마다 눈물이 난다. 그날 마라톤에서 뿐만이 아니라 인생에서 고비가 올 때마다 나를 포기하지 못하게 한 말이다.

다른 분들과 헤어지고 나는 한 블록은 걷고 한 블록은 가볍게 뛰기를 반복했다. 뉴욕시민들이 길가에 나와서 박수를 보내는데 산책 나온 사람처럼 마냥 걸을 수만은 없었다. 세계의 거의 모든 민족이 모여 사는 대도시를 가로지르는 마라톤 코스는 가는 길마다, 동네마다 색다른 응원 문화를 보여주었다. 또 ‘다음 동네엔 또 어떤 응원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으로도 더 가게 되었다. (솔직히 양쪽 길가에 쳐진 울타리를 넘어가는 일도 보통 용기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4만명의 마라토너는 각기 다른 이유로 달리고 있었는데, 그중 상당수는 그 이유를 티셔츠에 적어 놓아서 따라가며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결혼을 앞두고 짧은 면사포를 쓴 신부와 예복을 입은 신랑도 있었고, 영문은 모르겠지만 2m 가까이 되는 에펠탑 모형을 이고 지고 달리는 분도 있었다. 푸르메재단처럼 좋은 일을 홍보하고 모금을 할 목적으로 참가한 사람도 많았다. '몇 년 전 병으로 떠나보낸 아들의 삶을 기억하고 싶어 달린다'는 글귀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뛰는 아버지의 등은 더욱 뜨거웠고, 목발을 짚고 한 발로 걷는 분을 만났을 때는 눈물의 응원을 보냈다.

그렇게 구경을 하며 걷고 뛰다 보니 하프 지점이었다. 하프마라톤을 했다는 감격으로 또 얼마를 가다 보니 어느새 나의 최고 기록 8km의 거의 세 배를 지나왔다. 이미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니었다. 왼쪽 다리는 빠질 것처럼 아파졌고, 한 발자국을 디딜 때마다 아…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맨해튼 시내에 들어가면 응원이 축제처럼 멋지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기진맥진하여 거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가 지나가다가 자기가 받은 바나나를 줘서 그 힘으로 몇 발자국을 더 옮겼고, 누가 내 옷에 붙은 태극기를 보고 “고(Go) 코리아~”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서 애국심으로 또 몇 발자국을 떼었다.

날도 저물어가고 체온이 떨어져 앞서 뛰어간 어느 마라토너가 버리고 갔을 점퍼를 주워 입었다. 때로는 어디서 그만두어야 할지 도무지 마음의 결정이 나지 않아서 계속 가게 되는 인생처럼, 그날의 내 마라톤이 그랬다. 어디서 그만둘지 마음의 결정이 나지 않으니 다음 발자국이 떼어지지 않을 때까지 걷자고 하며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길가의 울타리도 다 치워졌고, 응원하는 사람도 없고, 경찰만 중간중간 서 있었다. 마지막 무리에서도 점점 뒤처졌다. 이젠 모든 세포가 한계에 이르렀다고 느낀 그때, 거짓말처럼 들려온 소리가 있었다. “이지선 화이팅!!! ”

이지선 교수가 마라톤을 뛸 당시 응원을 나와주었던 시민과 함께 찍은 사진. 이지선 교수 제공

이지선 교수가 마라톤을 뛸 당시 응원을 나와주었던 시민과 함께 찍은 사진. 이지선 교수 제공

센트럴 파크 입구에서 어느 한국 여자분이 ‘이지선 화이팅!’이라고 쓰인 노란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전날 내가 마라톤에 참가한다는 기사를 보고 나를 응원해주고 싶어서 피켓을 만들었고, 응원하던 사람들이 다 떠난 그때까지 혼자 남아 나를 기다린 거였다. 나랑 약속을 한 건 당연히 아니고, 더군다나 내가 거기까지 올 것이라는 건 나조차 몰랐는데 말이다. 그 날 처음 만난 그분의 마음이 고마워서 거의 얼싸안고 사진을 찍고, 감사 인사를 스무 번쯤 했다. 나는 양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거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발을 떼었다. 응원의 힘은 놀라웠다. 질질 끌고 왔던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쭉쭉 뻗기 시작했다. 나도 움직이고 있는 다리를 신기하게 내려다보며, 다시금 내 다리가 내 다리 같지 않은 경험을 했다. 결국 그 응원의 힘 덕분에 7시간 22분 26초의 기록으로 42.195km를 완주했다. 포기하지 않아서 일어난 기적을 맛본 순간이었다. 꼴찌나 다름없었지만 1등이 나만큼 기뻤을까 싶었다.

우리 모두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하고 있다. 때론 죽을 것 같은 고비를 만나기도 하고, 나처럼 그런 고비를 한번 겪었다 해도,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란 보장도 되어있지 않은 그런 인생을 살아간다.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역할이 주어지기도 하고, 너무 힘들면 이걸 왜 하고 있는지 모호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힘든 인생의 마라토너들에게 내 앞에서 노란 응원 피켓을 들고 소리쳐주신 그분의 마음으로 응원해드리고 싶다. 자신이 계획한 인생과는 조금 다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살아 볼 만한 것이며, 우리에게 저마다의 꽤 괜찮은 해피엔딩이 있을 것을 기대하며 살아보자고, 그러니 포기하지 말자고 응원하고 싶다. 포기하지 않을 당신에게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