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후, 12년 전 일기장 속 버킷리스트 또 지울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2년 전, 초등학교 6학년이던 이정후(24·키움 히어로즈)는 매일 일기를 썼다. 그날 어떤 훈련을 했는지 돌아보고, 언젠가 꼭 이루고 싶은 목표도 하나씩 적었다. 프로 6년 차가 된 올해, 우연히 그 일기장을 다시 펼쳐 본 이정후는 "기분이 묘했다"고 했다. 그때 목표로 했던 리스트 중 절반 이상을 이미 이뤄냈기 때문이다.

지난 8일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패해 준우승이 확정된 뒤 아쉬워하며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준비하는 키움 이정후. 뉴스1

지난 8일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패해 준우승이 확정된 뒤 아쉬워하며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준비하는 키움 이정후. 뉴스1

'1차 지명을 받고 프로에 입단하기, 국가대표로 뽑혀 국제대회 나가기, 골든글러브 수상하기, 타격왕 되기, 신인왕 되기, 최고의 유격수로 인정받기.' 꼬마 야구선수 이정후의 '버킷 리스트'에 담겨 있던 포부들이다. 이정후는 프로에서 보낸 첫 5년 동안 이 항목들을 빠른 속도로 지워나갔다. 키움 입단 후 포지션을 외야수로 바꾸면서 마지막 항목을 '유격수' 대신 '외야수'로 고쳐 적어야 했을 뿐이다.

이정후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막연하게 꿈꿔왔던 일들이 하나씩 이뤄졌다는 게 신기하다. 그때만 해도 정말 '꿈'이라고 생각하면서 써내려갔는데, 그 일기장 속 내용이 진짜 '현실'이 됐다니 신기하기도 하다"며 웃었다.

아직 모든 소원을 다 이룬 건 아니다. 이정후가 지우지 못한 버킷 리스트 항목은 이제 딱 3개 남았다. 한국시리즈 우승, 메이저리그(MLB) 진출 그리고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다.

이정후는 이 중 첫 번째 목표를 위해 올가을 투혼을 불살랐다. 준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까지, 키움이 치른 15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해 공수에서 맹활약했다. 그라운드 밖에서도 그랬다. 끊임없이 '파이팅'을 외치면서 선배들을 응원하고 후배들을 다독였다. 치명적인 실책을 한 후배 김휘집이 눈물을 흘리며 자책하자 "괜찮다. 우리 모두 실수하려고 저기(그라운드에) 나가는 것"이라고 위로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지난 8일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2-2로 맞선 6회 역전 솔로포를 터트린 뒤 홈을 밟는 키움 이정후. 연합뉴스

지난 8일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2-2로 맞선 6회 역전 솔로포를 터트린 뒤 홈을 밟는 키움 이정후. 연합뉴스

키움은 결국 준우승으로 포스트시즌을 마감했다. 이정후 역시 '우승'이라는 오랜 꿈의 문턱에서 아쉽게 돌아섰다. 하지만 남은 리스트 3개 중 또 다른 하나는 곧 '현실'이 될 수 있다.

KBO는 오는 17일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그랜드볼룸에서 2022 KBO 시상식을 개최한다. 올해 정규시즌 최고의 활약을 펼친 MVP와 신인왕을 발표하고 시상하는 자리다. 이정후는 올 시즌 가장 유력한 MVP 후보로 꼽힌다. 142경기에서 타율 0.349(553타수 193안타), 홈런 23개, 113타점, 출루율 0.421, 장타율 0.575을 기록하면서 타격 5관왕(타율·타점·안타·출루율·장타율)에 올랐다. 프로에 데뷔한 2017년부터 매년 꾸준히 성장하면서 '진화하는 야구 천재'의 진가를 보였다.

이정후는 "어린 시절의 희망을 하나씩 이뤄나가는 건, 내가 계획했던 길을 잘 걸어가고 있다는 의미인 것 같아서 뿌듯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점점 새로운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열두 살 이정후의 꿈을 거의 다 이룬 스물넷의 이정후는 12년 후 어떤 목표들을 '도장깨기' 하고 있을까. KBO리그 최고 타자 이정후의 야구 인생은 여전히 무한 확장 중이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