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늦가을이다. 단풍 화려했던 나무도 머지않아 휑한 모습을 드러낼 테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남도로 내려가야 하는 이유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4시간 거리인 전남 나주는 요즘 단풍이 절정이다. 수령 500~600년에 달하는 우람한 은행나무는 샛노란 잎으로 눈부시고, 450m 보행로에 도열한 메타세쿼이아는 진득한 갈빛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지난 3~4일 나주의 만추를 만나고 왔다.
남도의 작은 서울
예부터 나주를 소경(小京)이라 했다. 고려 시대부터 지금의 광역시에 해당하는 12목(牧) 중 하나였고 지형과 지세도 서울과 닮아서였다. 금성산이 북한산, 영산강이 한강, 나주천이 청계천을 연상시킨다. 나주읍 원도심에는 전국 3대 향교 중 하나로 꼽히는 나주향교가 있다. 조선 태종 7년(1407년) 설립했는데 역사와 규모가 서울 성균관 못지않다. 나주시 이교숙 문화관광해설사는 "보물인 '대성전'은 공자의 고향인 취푸(曲阜)에서 가져온 흙으로 지었다"며 "성균관에 불이 났을 때 나주향교를 모델로 재건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도 나주향교에서 찍었다.
나주향교를 비롯한 원도심 문화유산은 가을에 더 빛난다. 단풍 든 노거수가 많아서다. 대성전 마당에 600년 세월을 향교와 함께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살고, 수령 500년에 달하는 비자나무도 있다. 조선 시대 객사(客舍)였던 '금성관' 뒤뜰에는 수령 600년에 달하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고아한 모습으로 서 있다. 나주목을 다스리던 목사의 살림집 '금학헌'에는 사연 많은 500살 팽나무가 산다. 1980년대 벼락을 맞아 두 쪽으로 쪼개졌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나주 사람은 금학헌에 좋은 기가 흐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금학헌을 찾은 사람들은 팽나무에 손을 대고 복을 빈다. 샛노란 팽나무 단풍도 근사하다.
향교 담장 뒤편에는 은행나무와 야자수가 어우러진 독특한 공간 '3917마중'이 있다. 폐가 7채가 5년 전 카페와 숙소로 탈바꿈했다. 한옥과 서양식 건축, 일본식 다다미가 공존하는 건물이 흥미롭고 나주 특산물인 배를 활용한 양갱, 쿠키 같은 디저트도 맛이 색다르다.
100년 역사의 산림연구소
원도심 밖에도 만추를 만끽할 장소가 많다. 먼저 가볼 곳은 산포면에 자리한 전라남도 산림자원연구소. 쭉 뻗은 메타세쿼이아 길로 유명하다. 메타세쿼이아는 늦가을 옷을 갈아입는다. 어지간한 나무의 잎사귀가 다 지고 나면, 노란색으로 다시 갈색으로 잎이 물들며 진득한 풍광을 연출한다. 전남 담양이나 곡성에도 멋진 메타세쿼이아 길이 있지만, 산림자원연구소 메타세쿼이아 길은 주변에 차가 다니지 않아 안전하고, 길이가 450m나 돼 풍광이 압도적이다.
연구소는 수목원도, 공원도 아니다. 그러나 여느 수목원 못지않게 넓고, 다채로운 전시원도 갖췄다. 67만㎡ 면적에 804종 3만6000본의 식물이 산다. 게다가 무료다. 연구소는 올해 100주년을 맞았다. 일제가 헐벗은 한반도에 나무를 심기 위해 설립한 임업 묘포장이 시작이었다. 1975년 광주에서 현재 위치로 이전했고, 1993년 산림환경연구소, 2008년 산림자원연구소로 이름을 바꿨다. 국내 유일의 난대림 수목원인 완도수목원을 이 연구소가 운영한다.
메타세쿼이아 길에만 관람객이 몰리는데 연구소 안에는 매력적인 산책로가 많다. 향나무길과 연구소 뒤편 식산 오름길도 좋다. 한겨울에도 싱그러운 초록 세상이 펼쳐진다. 오득실 산림자원연구소장은 "산길을 걷다 보면 삼나무·호랑가시나무 같은 난대수종을 많이 볼 수 있다"며 "11월까지 숲 해설과 치유의 숲 프로그램도 진행한다"고 말했다. 연구소 개방시간 오전 9시~오후 5시.
편백, 비자나무 우거진 산사
연구소 인근 남평읍에 자리한 은행나무수목원은 한 해 30만 명이 찾는 나주의 신흥 명소다. 60년 전, 매실 농사를 지으면서 병충해 방지 차원에서 심은 은행나무가 지금은 도리어 명물이 됐다. 황인철 사장도 은행나무가 몇 그루인지 세 본 적이 없단다. 약 30만㎡에 이르는 수목원 부지에 은행나무를 비롯해 은목서·홍가시나무 등 다양한 나무가 살고 있다. 비좁은 진입로 때문에 탈이 많았는데, 올가을에는 길을 정비해 드나들기가 훨씬 나아졌다. 지난 3일 방문했을 때 단풍이 절정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졌다. 그래도 바닥에 깔린 낙엽이 노란 카펫 같다. 입장권(5000원)을 사면 카페에서 쓸 수 있는 3000원짜리 쿠폰을 준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 보자. 목적지는 덕룡산 중턱에 자리한 천년고찰 불회사. 나주호를 끼고 달리면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도 그윽하다. 불회사는 366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창건했다. 무려 1656년 역사를 자랑한다. 규모는 작지만, 다포 양식으로 지은 대웅전, 종이를 여러 겹 덧대고 옻칠한 불상이 보물로 지정됐다.
사찰 진입로는 편백이 울울한 숲을 이룬다. 재미난 표정의 석장승이 마주 서 있는 입구를 지나면 울긋불긋 단풍과 사찰이 어우러진 풍광이 펼쳐진다. 지금까지 나주에서 노랑 천국을 만났다면, 불회사에서는 불타는 단풍을 볼 수 있다. 잎이 자잘한 '애기단풍'이 특히 많다. 절 뒤편 숲에는 비자나무가 우거져 있고 그 밑에 야생 차나무가 자란다. 비자나무 이슬을 먹고 자란 찻잎을 덖어 만든 '비로다(榧露茶)'가 불회사의 명물이다. 경내 비로다찻집에서 시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