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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하멜이 표류기를 쓴 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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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은 자.” 그는 틀림없이 자화상 속의 고흐일 것이다. 그런데 이건 조선왕조실록의 글이다. 제주도에 갑자기 등장한 서양 난파인 무리의 몰골을 조정에 보고한 문서다. 고흐처럼 그들은 네덜란드인들이었다.

제주도에 도착했던 36명 중 일부가 살아남았다. 13년 뒤에 8명이 나가사키로 탈출했고 2년 뒤에 남은 7명이 석방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 인원 중 서기가 직분에 충실하게 쓴 문서가 『1653년 바타비아발 일본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다. 나중에 한국에 번역된 이름은 『하멜표류기』다. 금수강산의 임금·관리·백성들은 이 괴상한 파란 눈들이 어디서 왔던 자들인지 끝까지 몰랐다. 당연히 이들로부터 얻은 정보도 지식도 없었다. 하멜과 일본의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실록 속의 그들이 어디서 온 누구였는지 여전히 감감할 것이다.

신기한 나라다. 유럽사에서 ‘저지대’로 지칭되는 지역이다. 산도 없어 부족한 흙으로 바다를 메웠으니 지표면은 해수면 아래 있고 그게 소중한 문전옥답일 리 없다. 그래서 먹고살려면 바다로 멀리 나가야 했던 모양이다. 더 많이 벌려면 더 멀리, 심지어 지구 동쪽 끝 일본의 나가사키까지 가야 했겠다. 풍랑 만나 좌초도 많았기에 바그너의 유령선 오페라 ‘방랑하는 화란인’까지 등장했다.

국민에게 충성 강요하는 국민의례
일본 제국주의에서 유래한 유산
국민 자유의 보장이 헌법의 가치
정부가 국민에 충성해야 민주국가

하멜 일행의 원래 목적지였던 나가사키는 일본이 네덜란드와 만나는 접합점이었다. 일본은 이들의 학문을 난학(蘭學)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그 대표적 분야가 해부학이었다. 하멜이 배를 타기 직전인 1632년에 그의 모국에서 화가 렘브란트는 상상하기 어려운 그림을 그렸다. 제목은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다. 네덜란드의 이 국보급 그림은 인간의 몸을 갈라 기어이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풍경이다. 이 그림이 걸려있는 도시는 헤이그다.

그런데 난파선의 낯선 야만인들을 만나 당황해하던 조선은 250년 뒤에는 제국도, 제국주의자들도 분명 아닌데 제국을 자칭했다. 그리고는 결국 진짜 제국주의의 풍랑을 만나 맥없이 좌초했다. 난파된 대한제국의 마지막 구조요청지도 헤이그다. 헤이그는 이제 대한민국에게는 사업지거나 관광지다. 그 대한민국에서는 구조요청이 아닌 이상한 맹세소리가 들린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그나마 바뀐 것이다. 이전에는 섬뜩하게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짐했다. 그래서 ‘국기에 대한 맹세’라고 부른다. ‘국민의례’의 핵심이다. 이걸 해부해보자.

자유로운 국가는 이견을 허용한다. 그러니 이렇게 일사불란·일치단결·기립맹세하라는 것부터 모순이다. 국민은 납세자다. 소득 잘라 세금 내고 인생 잘라 나라 지킨다. 법적 의무를 다하는 권력의 주체에 대한 이런 충성 맹세 요구는 민주국가의 헌법 가치에 하나도 맞지 않는다. 그러니 정의로운 국가가 되는 길도 아니다. 충성은 정부가 국민에게 해야 한다. 공무원은 세금으로 고용된 직업군이니 이름을 붙인다면 ‘국민의례’가 아닌 ‘공무원의례’가 되어야 마땅하다.

‘국민의례’와 ‘국기에 대한 맹세’의 뿌리를 캐면 좀 불쾌한 상황이 매달려있다. ‘궁성요배’와 ‘황국신민서사’가 바로 그것이다. 천황폐하께 신민으로서 충성을 다짐하라고 강요하던 그 시기다. 일제 강점기에도 친일부역자들은 대동아전쟁 징용을 성전참여라고 자랑스러워하라 했다. 그러나 전체주의적 다짐강요로 전쟁이 자랑스러워지지 않는다.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상징이다. 그런데 일할 때도 목숨 걸고, 놀 때도 안전 우려해야 한다면 각자도생의 난파선인데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는 어렵다. 반만년 역사·민족슬기·단일민족. 이런 주문을 되뇌면서 자랑스러워하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필요한 건 더 이상 구조요청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고 자랑스럽게 바꾸겠다는 의지다.

진정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던 순간으로 2002년 월드컵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축제 복판의 축구감독으로 또 네덜란드 도래인이 나온다. 한국의 반도체는 이 나라 장비로 만들 수밖에 없고 해저터널도 이 나라 기술로 뚫는다. 그런데 이 나라, 세계 최초의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마초 흡연 허용하는 근본없는 나라다. 국민의례조차 하지 않는 이 막돼먹은 나라의 막강한 경쟁력 바탕에 깔린 것은 집단의 충성서약이 아니고 개인들의 물적 욕망과 성취 자유다. 지구상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국가의 힘이다.

암스테르담이 드디어 세상 무역의 중심이 되기 시작한 때가 하멜의 시기다. 그런데 도대체 하멜은 왜 표류기를 썼을까. 불굴모험의 민족 자부심 고취 함양이 목적이었을까. 하멜은 고용되었던 동인도회사로부터 그간의 임금을 받아낼 증거물이 필요했을 뿐이다. 거기에는 자기 인생에 충실한 개인과 이를 보장하는 사회가 있다. 국민들이 충성서약 강요받지 않고 각각 행복 추구하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권리의 보장, 그게 정부가 국민에게 충성하는 길이다.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