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압수수색날 ‘인파 우려 보고서’ 삭제, 증거인멸인가 오비이락인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태원 참사’ 발생 전 인파 운집을 우려하는 내용이 담긴 용산경찰서 내부 보고서 폐기 의혹을 둘러싼 경찰 안팎의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문제의 보고서는 경찰청 특별수사본부(특수본)가 용산서 등에 대한 압수수색에 나섰던 지난 2일 작성자의 PC에서 삭제됐지만, 다른 직원의 PC에서 발견된 것으로 확인됐다. 특수본은 지난 6일 용산서 공공안녕정보외사과(정보과) 과장과 계장을 증거인멸 등 혐의로 입건했지만, “삭제는 규정에 따른 것”이라는 항변이 만만찮다. 한편 경찰은 입건된 용산서 정보과장 등을 추가로 대기발령 조치했다.

지난 2일 경찰청 특별수사본부 관계자가 압수수색을 위해 서울 용산경찰서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 2일 경찰청 특별수사본부 관계자가 압수수색을 위해 서울 용산경찰서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논란이 된 보고서는 용산서 정보관 A씨가 지난달 26일 ‘이태원 핼러윈 축제 공공안녕 위험 분석’이란 제목으로 작성한 것이다. 지난 4월 18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된 이후 맞는 첫 핼러윈인 만큼 많은 인파가 이태원 일대에 운집될 것이란 내용이 담겼다. 특히 지난달 29일 참사가 발생한 이태원 해밀톤 호텔 인근에서 이태원소방서까지의 구간 등에 많은 인파로 인한 교통사고 발생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다만 압사(壓死) 사고 가능성이나 기동대·경력 배치 필요성 관련 내용은 없었다.

 이 보고서는 이날 오후 서울경찰청 첩보관리시스템에 등록됐다가 3일 후 삭제됐다. 경찰 내부 시스템상 72시간이 지나면 첩보·정보 등 보고서는 자동으로 삭제되는데, 이는 대통령령인 ‘경찰관의 정보수집 및 처리 등에 관한 규정’(7조 3항)에 따른 것이다. 해당 규정은 경찰관이 수집·작성한 이슈 발생 시점이 지났다는 이유 등으로 불필요해지면 지체 없이 정보를 폐기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A씨가 사용하던 컴퓨터에 저장돼 있던 원본 파일이 압수수색 당일 삭제됐다는 점이다. 특수본 관계자는 지난 7일 브리핑에서 “참고인 조사를 통해 보고서가 삭제된 사실을 확인하고, ‘(보고서) 파일이 없으니 (애초) 작성하지 않은 것으로 하자’고 한 회유 내용이 조사됐다”고 밝혔다. 압수수색 직전에 이같은 회유가 있었다면 정보과장·계장의 증거인멸 의도가 의심된다는 게 특수본의 판단인 셈이다. 해당 보고서는 다른 직원의 컴퓨터에 공유·보관돼 있어 특수본이 확보할 수 있었다. 형법상 증거인멸죄는 타인의 형사사건 관련 증거를 인멸·은닉·위조할 때 징역 5년 이하 또는 7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한다. 특수본은 해당 보고서가 이임재 전 용산서장 등 경찰 관계자가 사전에 안전관리 대책 마련을 소홀히 했는지 등을 파악할 주요 증거로 보고 있다.

 PC와 내부망에서 삭제된 문제의 보고서는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 등에게 전달돼 지난 7일부터 사실상 공개됐다. 경찰 관계자는 “국회 측의 자료 요청에 따라 경찰이 제공한 문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국회 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해당 보고서는 서울청 정보 분야 관계자들로부터 대면보고를 받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일대에서 대규모 인명 사고가 발생해 119 구조대원들이 희생자들을 구조하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일대에서 대규모 인명 사고가 발생해 119 구조대원들이 희생자들을 구조하는 모습. 연합뉴스

 그러나 경찰 내부에선 반론이 쏟아지고 있다. 당시 상황을 잘 안다는 서울의 한 정보 경찰은 “보고서 작성자에겐 과장의 지시가 증거인멸을 위한 회유라고 들렸을 수 있지만 규정은 규정이기 때문에 보고서는 폐기하는 게 맞다”며 “당시 용산서 정보과에서도 ‘불필요한 건 지우자’고 한 것일 뿐인데 공교롭게도 그날 압수수색이 진행돼 오비이락(烏飛梨落·우연히 동시에 일어난 일로 오해를 받는 경우)이 된 셈”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경찰 관계자는 “정보 폐기 및 (PC 등) 보관 정보 정리 필요성은 상부에서도 관련 지시가 자주 내려오는 부분”이라며 “개인 실적 등을 위해 보관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이 규정 위반”이라고 말했다.

 이날 직위해제된 용산서 정보과장의 입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규정에 따라 직원 개인 PC에 보관 중인 자료를 정리하라 한 것일 뿐이다”라며 “서로 다른 사실관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고, 향후 조사 과정에서 충실히 소명하겠다”고 말했다.

 특수본은 서울청 정보부장이 지난달 30일 서울 관내 정보과장들이 모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단체방에서 “규정에 맞지 않는 문서는 보안점검 하라”고 한 상황을 특별감찰팀을 통해 파악했다. 서울청 정보부장의 이같은 발언이 용산서 정보과장의 지시의 배경이 됐는지도 확인할 예정이다. 특수본 관계자는 “두사람(작성자와 정보과장) 사이의 진술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며 “정확한 삭제 지시 경위를 확인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특수본은 A씨와 용산서 정보과장·계장뿐만 아니라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을 모두 조사해 진술 내용 중 어느 쪽이 신빙성이 있는지 확인할 방침이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