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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뜯겨진 우울증 약 46포…댄서의 꿈 꺾인 탈북청년 비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경남 김해에 사는 20대 북한이탈주민(탈북민)이 숨진 채 발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지난 8일 오후 경남 김해시에서 북한이탈주민 A씨가 살던 동네 모습. 위성욱 기자

지난 8일 오후 경남 김해시에서 북한이탈주민 A씨가 살던 동네 모습. 위성욱 기자

마지막 통화 “김치 가지러 갈게요”

9일 경남 김해 경찰 등에 따르면 탈북민 A씨(23)가 지난 7일 오후 6시쯤 김해시 한 주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날 오전 8시43분쯤 “손자가 연락이 안 된다”는 할머니(80) 실종신고를 받고 경찰과 유족이 현장에 나가 확인했다.

나흘 전인 3일 오후 6시25분쯤 “김치 가져가라”는 할머니(80) 연락에 “(일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토요일에 가지러 갈게요”라고 답한 게 그와 가족 사이 마지막 통화였다. 경찰은 "A씨 시신에 별다른 외상은 없었다"고 전했다. 출입문이 잠겨 있고, 외부 침입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A씨가 발견된 방 안에는 우울증ㆍ불면증 치료를 위해 처방받은 약봉지 55포 중 46포가 개봉된 상태였다. A씨는 3년 전부터 우울증ㆍ알코올중독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파악됐다.

할머니 등에 업혀 탈북했지만…

유족 등에 따르면 A씨는 2004년 6월 할머니·아버지(56)와 함께 탈북했다. 당시 5살이던 A씨는 할머니 등에 업혀 사선을 넘었다. 북한에서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고, 공안의 눈을 피해 몽골로 넘어갔다가 한국 땅을 밟았다. 그해 긴박하고 길었던 탈북 과정에서 충격을 받은 탓인지, 이후 A씨는 몸을 떠는 등 이상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유족은 이런 이상증세와 왜소한 체격 탓에 A씨가 불우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전했다. 학교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등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중앙일보 취재 결과 A씨는 중학생 때부터 ‘부적응’ 문제로 경북과 부산 지역 여러 중학교를 옮겨 다녔다.

A씨가 졸업한 학교 관계자는 중앙일보와 만나 “왕따나 괴롭힘을 당했던 기록은 없지만 (A씨가) 전반적으로 의욕이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 8일 오후 경남 김해시에서 북한이탈주민 A씨가 살던 동네 모습. 위성욱 기자

지난 8일 오후 경남 김해시에서 북한이탈주민 A씨가 살던 동네 모습. 위성욱 기자

가정형편 탓에 꺾인 ‘스포츠댄서 꿈’
하지만 A씨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스포츠댄스에 관심을 가지면서 달라졌다고 한다. 여러 스포츠댄스 대회에서 수상한 이력도 있다. 학교 측은 이때 A씨가 “목표의식이 뚜렷해지고 의욕적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유족도 “(A씨가) 스포츠댄스 대회에서 상도 많이 받아, 그 꿈을 키웠던 것 같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오래 가지 못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비용을 충당하기 어려웠고, 영양 불량으로 발육 부진까지 겹쳤기 때문으로 학교 측은 파악했다. 스포츠댄스를 접은 중학교 3학년부터 A씨는 다시 의욕을 잃고, 결석이 잦아졌다고 한다.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학교를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고교 시절 담임교사도 A씨가 가족과 10여평 단칸방에서 살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지정될 수 있게끔 학교 측에서도 애를 많이 썼다고 한다.

20살 성인이 된 이후 A씨는 대학을 가지 않고 식당 아르바이트, 프라이팬 공장, 일용직 노동자 등을 전전했다. 가족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여서 여전히 가정형편이 어렵다.

남북하나재단이 임대해 운영 중인 북한이탈주민 무연고 사망자 봉안당에서 추모하는 모습. 이 사건과 직접적 관련 없는 자료 사진. 사진 남북하나재단

남북하나재단이 임대해 운영 중인 북한이탈주민 무연고 사망자 봉안당에서 추모하는 모습. 이 사건과 직접적 관련 없는 자료 사진. 사진 남북하나재단

유족, 타살 가능성 제기
A씨 사망과 관련해 유족 측은 타살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시신 발견 당시, 현장에 함께 있었던 유족은 “아(아이) 얼굴과 옆구리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며 폭행이 원인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유족은 주거지 인근 폐쇄회로TV(CCTV) 확인 등을 경찰에 요청했다.

이와 관련, 경찰은 우선 A씨 시신에 나타난 멍 자국이 사후 발생하는 혈액이 뭉쳐 발생하는 시반으로 판단하고 있다. 경찰은 9일 오전 A씨 부검한 결과 외력에 의한 손상은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경찰은 사망 원인과 경위를 좀더 살펴보기로 했다.

1년 만 백골 발견…잇따른 탈북민 사망

사선을 넘어 탈북했지만, 적응에 어려움을 겪다 사망한 탈북민 소식이 잇따르고 있다. 심지어 사망한 지 1년 만에 백골이 된 탈북민 시신이 발견되기도 했다.

지난달 서울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된 40대 탈북민은 사망 추정 시기가 1년 전쯤으로 파악됐다. 국내에 잘 정착한 탈북민으로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던 40대 탈북민은 오랫동안 고립된 상태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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