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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북한이 이겼다”는 위험한 착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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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

북한 비핵화에 대한 비관론이 들끓고 있다. 한 외국 언론은 “북한이 이미 이겼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비핵화라는 정책 목표를 이제 포기해야 한다는 전문가 인터뷰를 싣기도 했다. 북한의 핵 보유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남북 간 군사 충돌 방지에 주력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드러난 상황만 보면 그렇다. 2019년 10월 스톡홀름에서의 북미 실무 회담을 끝으로 김정은은 미국의 대화 촉구에 전혀 응하지 않고 있다. 올 9월에는 핵의 선제 사용 가능성을 명시한 법을 제정했다. 최근에는 연이어 미사일과 포 사격을 감행하고 있다.

북한이 보여주려는 것만 쳐다보면 대북정책은 실패한다. 김정은이 감추고 싶은 사실을 간파해야 성공할 수 있다. 북한은 핵보유국 인정을 목표로 전략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를 위해 강점은 드러내고 약점은 숨기려 한다. 운동경기로 비유하면 북한은 핵 고도화와 군사적 긴장 조성을 공격수, 경제적 자력갱생을 수비수로 운용하고 있다. 공격수로 한미를 압박해 비핵화를 포기하게 만들고 군축과 제재 해제를 맞교환하려 한다. 경제위기를 자력갱생으로 막는 것은 수비의 역할이다. 그 핵심은 취약성을 숨기고 성과를 강조해 상대에게 난공불락이란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북한은 강점 드러내고 약점 숨겨
비핵화 목표 포기는 이에 속는 것
북한 약점인 경제를 활용하면서
억지력 기르되 과잉 대응 피해야

실상 수비는 해체 상태다. 핵 개발이 경제에 미치는 기회비용은 연 1조 원(남한) 이상이다. 김정은의 집권부터 제재가 작동하기 이전인 2016년까지 북한 경제는 연평균 2∼3% 성장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2017년부터는 연평균 성장률이 -3∼-4%로 급락한 것으로 보인다. 2010년대 중반의 북한 국민소득을 20조 원으로 추정할 때 적어도 5%, 즉 1조 원 정도를 2017년부터 해마다 잃고 있는 셈이다. 미래도 암울하다. 국제사회의 제재가 지속되는 한 경제는 정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비핵화 없인 제재를 해제 받기 어렵고 그 결과 북한으로 대규모 투자자본이 유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를 이긴 독재자는 없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소련의 레닌은 극단적인 사회주의 이념을 실천에 옮겼다. 화폐와 시장을 없애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했으며 중앙계획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4년 만에 제조업 생산이 70%나 감소하자 백기를 들었다. 화폐와 시장을 재도입했으며 토지와 소기업의 사유권을 인정하고 중앙계획도 포기했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그가 일으킨 대약진운동으로 2500만 명 이상이 기근 등으로 사망하자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룬 것 없이 권좌를 물려받기만 한 김정은의 카리스마는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끈 마오쩌둥보다 훨씬 약하다. 성과로 능력을 입증해야 장기적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그에게 핵은 자산이 아니라 부채에 가깝다.

공격도 압도적이지 않다. 핵을 가졌으니 군사적으론 북한이 승리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군사력은 상대적이다. 핵을 보유함으로써 북한 군사력이 강해진 것은 틀림없지만 한국의 재래식 전력도 진화했다. 북한의 위협이 심해질수록 한미의 확장 억지도 강화될 것이다. 무엇보다 전쟁은 자원의 싸움이다. 북한 경제 규모는 남한의 1%에 불과하다. 북한 핵 개발은 남북 사이에 벌어진 엄청난 자원의 격차를 확대할 따름이다. 수비는 해체 상태인 데다 공격도 상대를 압도할 수 없는 북한이 어떻게 승자가 될 수 있나.

김정은의 연이은 무력도발은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라는 고백과 같다. 그가 이미 이겼다면 도발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북한 경제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던 1995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돌아갔다. 고난의 행군이 1997∼98년 절정에 달했듯 향후 2∼3년이 김정은에게 결정적인 시기다. 핵과 경제 사이 선택을 강요받을 수도 있다. 지금의 도발은 그 시기가 오기 전 ‘핵과 경제를 병진’하겠다는 노림수다. 군사적 긴장 조성으로 판을 흔들어 한국이나 미국의 악수(惡手)를 유도하려는 목적이다.

우리는 패닉에 빠져 과잉 대응하지 않아야 한다. 북한의 격한 도발은 예상된 것이다. 김정은이 순순히 비핵화를 할 것이라며 순진하게 대응했던 까닭에 몇 년을 허비했을 뿐이다. 경각심을 가지고 군사적 억지력을 강화하면서도 냉철해야 한다. 당장 핵 무장하자거나 남한에 전술핵을 재배치하자는 주장이 대표적인 과잉 대응이다.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위기와 한미공조 균열이 바로 북한이 노리는 바다. 더욱이 남북 모두 핵을 쥔 채 대립하면 한반도의 미래를 개척할 수 없다. 또한 정부는 제재 모니터링과 집행을 위해 인력과 예산을 늘리고 기업, 금융권과도 체계적으로 조율해야 한다. 특히 북한의 광물 수출을 차단하고 가상화폐 해킹을 막아 북한으로의 외화 유입을 줄여야 한다.

북한이 이겼다는 주장은 착각일 뿐 아니라 위험하다. 이 주장이 드세질수록 김정은은 자신의 계략이 맞아떨어졌다고 믿고 군사 도발의 수위를 높일 것이다. 김정은이 준비한 불꽃놀이만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북한이 감춘 의도와 전략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정책을 세워야 한다.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