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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감각과 영혼의 움직임을 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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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1912년 초연 당시 ‘이것이 음악이라면 두 번 듣게 하지 마소서’라는 혹독한 반응을 받았던 쇤베르크(A Schonberg)의 ‘달에 홀린 피에로’가 2022년 가을, 한국 청중으로부터 큰 환호를 받으며 공연되었다. 성악과 실내 앙상블을 위한 이 작품은 전통적 조성에서 벗어난 무조음악으로, 110년 전  초연 당시 센세이셔널한 큰 충격을 음악계에 던져주었지만, 이후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일찌감치 현대 음악의 고전 반열에 올랐다. 음악적 아름다움과 청중의 취향이 시대에 따라 변화되는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달에 홀린 피에로’는 지난달 22일부터 8일간 개최된 ‘2022 서울국제음악회’의 일곱 번째 음악회에서 무대에 올랐다. ‘우리를 위한 기도’(Pray for us)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국제음악회는 음악으로 소통하고 치유하는 미래를 그리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지난 28일 서울 예술의전당 IBK홀에서 열린 공연에서는 파가니니(N Paganini)와 모차르트(W A Mozart)의 실내악 작품에 이어 ‘달에 홀린 피에로’가 연주되었다.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
‘2022 서울국제음악회’ 공연
장식이 없는 진실의 소리 감동
청중의 달라진 미적 취향 확인

작곡가 쇤베르크 자화상. [중앙포토]

작곡가 쇤베르크 자화상. [중앙포토]

연극배우이자 성악가였던 체메(A Zehmen)의 위촉으로 벨기에 시인 지로(A Giraud)의 독일어 번역시를 마주한 쇤베르크는 ‘바로 내 스타일’이라고 큰 관심을 보이며 작곡에 착수했다. ‘달과 피에로’를 중심으로 아이러니한 회의주의와 유미주의, 죽음의 풍자, 사회비판 의식이 담긴 시에 깊이 공감한 것이다.

쇤베르크는 첫 곡을 완성한 후 일기장에 “음향은 여기서 감각과 영혼의 움직임에 대한 매우 동물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21곡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중심 모토가 되었다. 쇤베르크는 인간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은 억압된 감각을 끌어내고 그 움직임을 가감 없이 분출하고자 했고, 이를 통해 ‘장식으로 가려지지 않은 진실의 세계’를 음악으로 끌어내고자 했다. 그는 전통과의 단절을 단행했다. 조성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부드러운 벨칸토의 성악 선율 대신, 말과 노래의 중간노선을 택하는 말하는 선율(Sprechstimme) 기법을 활용했고, 21곡 각각을 다른 편성으로 구성하면서 음악적 색채감을 강조하였다.

반갑게도 이번 공연에서는 바로 이런 미적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홍석원의 지휘로 소프라노 서예리가 노래했고, 국내 정상급 연주자인 백주영(바이올린), 박하양(비올라), 이정란(첼로), 나채원(플루트, 피콜로), 채재일(클라리넷, 베이스 클라리넷), 임효선(피아노)이 앙상블을 맡았다. 검은색 드레스에 짙은 눈화장을 한 소프라노 서예리는 카리스마로 무대를 장악했다. 그는 두 옥타브 반이 넘는 넓은 음역을 넘나들면서, 정확한 음정과 리듬을 지키며 정확한 독일어 발음을 토대로 ‘말하는 선율’을 노래했다. 앙상블 역시 각 곡의 독특한 색채감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눈으로 마시는 포도주를 달은 밤새 파도에 쏟아붓는다’는 첫 곡은 유명한 피아노의 7음 모티브의 의미심장한 반복으로 시작되었고, 거칠고도 섬세한 성악과 날카로운 바이올린은 불꽃이 튀는 듯한 생생함을 드러냈다. ‘음침한 검은색 거대한 나비’로 시작되는 제2부의 첫 곡 ‘밤’에서는 어둡게 채색된, 실존에 대한 고민을 느낄 수 있었다.

카산드로스의 해골에 구멍을 뚫고 그것으로 담배를 피우는 심술궂은 피에로의 행동이 의외로 건조하게 표현된 16번 ‘비열함’에서 서예리는 마치 춤을 추는 듯한 몸짓으로 곡의 흐름을 표현하였고, 앙상블은 침묵과 거친 음향의 폭발에서 나타나는 대조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반면 죽음의 병이 든 달을 향한 피에로의 연민과 열망이 강하게 표현된 7번 ‘병든 달’에서 성악과 플루트는 서로 충분히 화합하지 못했고, 17번 ‘패로디’에서는 가사가 명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또한 캐논과 푸가 기법이 치밀하게 조합된 18번 ‘달의 얼룩’에서는 곡의 구조가 충분히 드러나지는 않아 아쉬웠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이번 공연은 쇤베르크가 추구했던 ‘감각과 영혼의 움직임’을 생생한 색채감으로 드러낸 수준 높은 연주였고, 그래서 인간 내면을 날것으로 대면하며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열어 주었다.

공연이 끝난 후 청중은 잠시 어색하게 침묵했다. 그러나 곧 큰 박수가 터졌다. 뭔가 낯설지만 거칠고 강렬한 아름다움이 청중을 사로잡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술이란 인간의 운명을 자신의 내면에서 체험하는 자가 외치는 비명”이라는 쇤베르크의 예술혼이 청중에게 전달된 깊은 가을밤이었다.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