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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생명 후폭풍'에 금융사들 전전긍긍…'무늬만 자본' 영구채發 위기 오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3일 서울 종로구 흥국생명 본사 모습. 연합뉴스.

3일 서울 종로구 흥국생명 본사 모습. 연합뉴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채권 시장에 신종자본증권, 이른바 '영구채'가 주요 복병으로 떠올랐다. 흥국생명이 당초 신종자본증권의 중도 상환을 연기하겠다고 했다가 역외 채권시장이 크게 흔들리자 지난 7일 입장을 바꿔 다시 중도 상환하겠다고 밝히면서다.

흥국생명의 입장 번복 과정에서 신종자본증권이 지닌 위험성이 드러나면서 금융회사와 금융당국의 고심도 깊어졌다. 신종자본증권은 일정 시점 마다 만기를 영구적으로 연장할 수 있어 영구채로 불린다. 이 때문에 회계상 자본으로 분류돼 기업들의 자기자본 확충 수단으로 널리 활용된다. 하지만 현실에선 만기를 계속 연장하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이번에 확인됐다. 국내 보험사들이 그간 관행적으로 조기 상환을 해온 터라 이를 미뤘다간 자칫 '신뢰 상실' 기업으로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영구채 아닌 영구채'가 신용 리스크를 촉발할 수 있는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불거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금융회사 관계자는 “만기 연장 기능이 없는 영구채가 어떤 효용이 있는지 의문”이라며 “그렇다고 기존 영구채를 중도 상환하자니, 금융당국이 권고한 자본 건전성 수준을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전했다.

내년 중도 상환 영구채 14조6000억 

8일 KB증권에 따르면 내년 한 해 동안 중도 상환 기한이 도래하는 영구채는 14조5720억원에 달한다. 영구채는 금융당국으로부터 회계상 자본으로 인정받은 2013년 이후부터 발행량이 급증했다. 지난해에는 5조5838억원 어치가 발행돼 5년 전보다 7배 이상 증가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업종별로는 은행·보험사 등 금융회사들의 활용도가 높은 편이다. 자본으로 인정받는 특성 덕분에 유상증자 등 실질적인 자본 확충 없이 금융당국의 자기자본비율 규제를 맞추는 수단이 됐다. 이 때문에 내년도 중도 상환 기한 도래액의 94%가 모두 금융회사가 발행한 영구채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시장금리 오를 땐 발행기업은 만기 연장이 유리 

영구채는 원칙적으론 만기 연장이 가능하지만, 중도 상환하지 않으면 금리가 2~3%포인트씩 계단식으로 오른다. 이 때문에 대부분 기업은 만기 연장보다는 중도 상환을 선택했다.

그러나 시장금리가 영구채 만기 연장 금리보다 더 빠르게 오르는 상황에선 중도 상환을 하지 않는 것이 발행 기업에 더 유리할 때도 있다. 가령 흥국생명이 중도 상환을 하지 않을 경우 영구채 금리는 기존 4.475%에서 6.7% 수준으로 오른다는 계산이 나온다. 최근 보험사 신종자본증권 발행금리가 7%에 육박하는 상황에선 중도 상환보다 만기 연장이 유리하다. 최성종 NH투자증권 연구원은 “흥국생명의 경우 영구채를 중도 상환하면 (보험사의 자기자본비율인) 지급여력비율(RBC 비율)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며 “회사 입장에선 만기 연장을 하는 게 최선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사실상 '5년 만기 회사채' 된 영구채..."자본 맞아?" 

하지만 흥국생명의 입장 선회를 계기로 이런 영구채의 장점을 사실상 활용하기 어렵게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중도 상환을 하지 않으면 시장 내 '낙인 효과'로 자금 조달이 아예 막힐 우려가 생기면서다. 사실상 금리만 높은 ‘5년 만기 회사채’로 운영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영구채의 만기 연장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면 이 증권을 회계상 자본으로 분류하는 것부터 논란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신용평가사들은 영구채 발행기업들이 다가오는 중도 상환 시점에 어떻게 대응할 지 눈 여겨 보고 있다. 영구채 상환 이후 재무 지표가 악화하는 기업들은 신용등급을 강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원하 나이스신용평가 연구원은 “향후 진행 상황을 봐야겠지만, 영구채를 갚으려고 또 돈을 빌리면 부채 급증으로 신용도가 낮아질 수 있다”고 전했다. 황 연구위원도 “자기자본비율이 낮은 금융회사들은 영구채 상환 이후 적기시정조치(자본을 빨리 확충하라는 금융당국의 행정조치) 대상에 들어갈 수 있는 등 코너에 몰릴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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