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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류호정이 고발한다

"월드컵 오는 게 무섭다" 생활비 절반 날아갈판, K콘텐트 그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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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류호정 정의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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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현서 기자

그래픽=김현서 기자

"조명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일하다 다친 이가 해고당한다. 작업 스케줄에 따라 임금 절반이 깎이기도 한다. 오늘은 출근했지만, 내일은 퇴사할지 모른다. 수많은 방송·연예계 종사자의 현실이다. K팝, K드라마 등 한국 콘텐트 위상이 높아진 만큼 관련 업계에서 일하는 이들의 행복도도 높아지나 싶었지만, 노동 환경은 여전히 열악했다. 화려한 조명과 렌즈에 가려져 눈치채지 못했던 누군가의 삶이 그렇게 그곳에 있었다.

나는 제21대 국회 후반기, 문화체육관광위에 배정됐다. ‘노동’과 ‘노동자’를 중심에 둔다는 대원칙은 그대로지만 상임위가 바뀌면 의원실의 세부 업무 방향이 달라진다. 국정감사를 앞두고 방송 제작, 연예 매니지먼트 업계 노동자들을 만나 현장의 경험을 들었다. 그들의 노동은 생각보다 더 처참했다.

지난달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방송 외주 제작사 근로자의 권리 보장 문제에 대해 질의하는 류호정 정의당 의원. 사진 류호정 의원실

지난달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방송 외주 제작사 근로자의 권리 보장 문제에 대해 질의하는 류호정 정의당 의원. 사진 류호정 의원실

원청에서 멀어질수록 노동자를 둘러싼 방어벽은 더 조악해진다. 노동현장의 공식과도 같은 이 법칙이 연예업계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었다. 임금체불, 갑질, 부당해고 등 노동법 위반이 가득한 ‘종합선물세트’를 민원으로 들고 온 외주제작 방송 스태프들에게 “가장 먼저 해결하고 싶은 문제 1순위가 무엇이냐” 물었다. 한 방송작가는 ‘근로계약서 쓰기’라고 답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한장의 계약서가 이들을 투쟁의 현장으로 이끌고 있었다. 10년, 20년 일하면서 근로계약서를 한 번도 써 보지 못했다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미처 몰랐던 우리 사회의 ‘무계약지대’다.

근로계약서가 있어야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처우를 보장받을 수 있다. 근로계약서가 없으니 방송사나 제작사 누군가의 말 한마디, 카톡 메시지 하나로 해고당할 수 있었다. 연인과 헤어질 때 카톡으로 통보해도 욕먹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이렇게 밥줄과의 인연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끊어지고 있다. 임금이 체불됐을 때 역시 일했다는 증거가 없기에 신고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니 연차나 야근·휴일 수당은 언감생심이다. 추가 보상은 없다. 이런 일들이 당연하단 듯이 방송 현장에서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무책임했다. 아니, 애초에 아무 관심도 없었다. 계약서 없이 일 시키는 외주제작사들을 관리·감독하기 위해선 일단 ‘실태’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외주제작 방송 스태프들의 존재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콘텐트진흥원의 실태조사는 방송국과 직접 일하는 정규직, 비정규직만 대상으로 할 뿐 외주제작사의 방송 스태프는 아예 배제되어 있었다. 이들은 투명인간이었다.

지난해 4월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등 6개 단체가 KBS 본사 앞에서 드마라 제작 스태프 표준 근로계약서 작성을 촉구하는 회견을 열었다. 중앙포토

지난해 4월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등 6개 단체가 KBS 본사 앞에서 드마라 제작 스태프 표준 근로계약서 작성을 촉구하는 회견을 열었다. 중앙포토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포기할 수 없었다. 우리 의원실은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 방송스태프지부와 함께 외주 PD·작가 등 25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계약서 없이 일하는 비율이 절반(51.4%)이 넘었다. 대부분 '제작사가 써주지 않았기 때문'(75.5%)이었다. 지난 추석에는 10명 중 6명이 임금체불을 겪었다. 결방 때문이었다. 프로그램을 이미 제작했어도, 방송이 안 나가면 돈을 못 받는다. 가령 한 달에 네 번 하는 방송이 두 번을 결방하면 생활비 절반이 날아간다. 응답자 대다수(64.4%)는 20일 시작하는 카타르 월드컵 기간에 생길 결방으로 인한 임금체불 피해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결 방법이 없다. 계약서 없는 투명인간에게 합리적 대안을 제시해 줄 따듯한 이는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국정감사가 시작됐다. 외주 제작사가 법을 잘 지키고 있는지 점검해야 할 법적 책임은 문화체육관광부에 있다. 문화예술인복지법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다. 나는 문체부의 직무 유기를 지적했다. 실태조사는 물론이고, 환경 개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답변을 끌어냈다. 점검을 안 하니, 다들 태만했다. 계약서 없는 투명인간이 계약서 있는 노동자가 되면 어디선가 대안이 불쑥 나오곤 한다.

변해야 하는 곳은 또 있다. 연예 매니지먼트 업계다. 럭셔리 브랜드 매장이 즐비한 서울 청담동 명품 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묵직한 검은색 가방을 들고 다니는 청년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패션 스타일리스트 업체와 계약한 어시스턴트로 촬영장과 매장을 돌며 옷을 픽업하고 반납한다. 이들이 퀵 비용보다 싸게 먹히기에 업체는 퀵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다.

연예계 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가 무거운 가방을 옮기는 모습. 유튜브 '워크맨' 영상 캡처.

연예계 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가 무거운 가방을 옮기는 모습. 유튜브 '워크맨' 영상 캡처.

임금이 서비스 비용보다 더 저렴해진 이유는 구조적 문제에 있다. 패션 스타일리스트 업체가 연예기획사로부터 일감을 받으면 도급계약을 맺어야 한다. 그 계약금으로 업체는 수익도 내고 어시스턴트와 근로계약을 맺어 월급도 준다. 그러나 기획사와 스타일리스트 업체가 맺는 도급계약은 대개 서면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수천만 원 단위도 “이번 사업은 얼마로 하자”는 식의 구두 계약으로 한다. 서로 좋은 게 좋은 그런 계약에 인건비 등이 제대로 책정될 리 없고, 문제가 생겨도 책임 주체가 없다. 어시스턴트가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올해 고용노동부에서 진행한 근로 감독 결과 연예기획사 2개 사, 그리고 이 기획사와 일정 금액 이상의 도급계약을 체결한 패션 스타일리스트 업체 10개소가 근로계약서 없이 고용하고 연장근로수당도 주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패션 스타일리스트업체 전체로 보면 총 43건의 노동관계법 위반이 적발됐다. 10곳 중 7곳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고, 10곳 중 6곳은 임금 명세서를 교부하지 않았다. 서면으로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어시스턴트 계약서 역시 표준 근로계약서 서식을 엉망으로 활용했다. 게다가 연예인의 일정에 따라 근로일과 근무 시간이 수시로 바뀌는 바람에 여기 적힌 근로 시간과 휴게시간은 사실상 의미 없는 숫자였다.

다시, 국정감사장이다. 이미 이 문제로 노동부가 문체부에 근로 감독 내용을 공유하고 실무 논의를 진행했음에도 문체부는 협업 약속 후 몇 달이 지나도록 이행하지 않았다. 나는 문체부의 책임 방기를 지적하고, 표준 하도급 계약서 및 노동환경 확보 가이드라인을 만들 것을 주문했다. 한 번 더 열악한 근로 실태를 개선하겠다는 약속, 노동부와 협업하겠다는 약속을 끌어냈다.

마지막으로, 현장에서 전해 들은 촬영장의 조명은 명과 암이 더 뚜렷했다. 화려한 곳은 한없이 밝았고, 어두운 곳은 더없이 침침했다. 그런데도 오늘도 조명이 잘도 돌고 있는 건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자신의 몫을 감당하는 누군가의 노고 덕분이다.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볼 때 화면 속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을 한 번쯤 떠올려봤으면 좋겠다. 사람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까지 시민들이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정부가 안다면 더 속도감 있는 변화가 생길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