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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이태원 참사:무서운 현실, 무서운 마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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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용산 이태원 참사로 156명이 사망하였다. 거기에는 세계 14개국 26명이 포함된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비극이다. 깊은 애도의 마음을 갖는 것은 우리가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더 큰 상처는, 이번 사태가 지진·태풍·붕괴를 포함한 어떤 인간외적 요인도 없이 오직 군중밀집·직무방기·대응실패를 비롯한 인간적 요인들로 발생했기 때문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한꺼번에 서서 죽고, 깔려 죽고, 숨 막혀 죽는 사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참사다.

사건의 크기로 인해 원인과 책임, 사과와 재발 방지를 위한 논의와 규명은 필수다. 우리 공동체는 인명사고의 빈발과 대책의 반복이라는 악순환에 익숙하다. 때문에 그 고리를 끊는 것은 모두의 시대적 소명이다. 큰 슬픔이 요구하는 큰 깨우침을 말한다.

막대한 희생과 이후 상황 큰 비극
쪼개진 두 마음과 나라 절대 안돼
솔로몬 재판의 진짜 엄마가 해법
생명·아이·나라 살리는 대통합을

먼저 법적 책임이다. 사태 당시 직임과 직무에 따른 조치다. 즉 직임이 없는 사람은 법적 책임이 없다. 따라서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말은 ‘아무도 책임이 없다’는 말과 같다. 아니면 법적 책임을 윤리적 문제로 덮는 위험한 논리다. 직임자의 공적 책임은 개인에 대한 인격적 차원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직책·책무에 대한 비인격적·비개인적 책임을 말한다.

요컨대, 공정과 형평의 원칙이다. 이 개인과 저 개인, 내 편과 네 편을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면 법이 아니다. 법치의 제일 원리다. 몽테뉴와 파스칼을 비롯해 근대의 정의=법 관념을 정초한 선현들은 그것을 산과 강의 이쪽과 저쪽에 비유한다. 따라서 법은 특정 사람과 당파를 넘어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당파와 진영의 골은 법 적용에서 산보다 높고 강보다 깊다.

법적 책임을 넘는 곳에 영향력에 따른 정치적 책임이 존재한다. 둘은 때로는 겹치고 때로는 다르다. 셋째는 공동체 시민으로서 사회윤리적 책임이다. 끝으로는 인간으로서의 괴로움과 공감의지다. 셋째와 넷째는 모두의 책임의지와 반성을 말한다.

네 차원 모두에서 이태원 참사는 우리의 무서운 두 마음과 두 현실을 드러낸다. 현장의 죽어가는 한쪽과 춤추고 노래하는 다른 한쪽의 존재는, 후자가 전자를 알았든 몰랐든 사태 당시의 두 현실이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것은 사태 이후의 현실과 마음들이다. 무고한 집단죽음에 대한 진영과 파당에 따른 날 선 접근과 말들은, 결과가 원인을 드러내는 뒤집힌 단면이다. 죽음과 문제 해결의 정치화와 파당화를 말한다.

그간 우리는 솔로몬의 재판의 주인공을 잘못 알고 있었다. 솔로몬 왕이 아니다. 아이를 살리려는 엄마다. 가짜 엄마는 아이를 둘로 쪼개어 반씩 갖자고 주장한다. 죽임과 독식의 논리다. 반면 진짜 엄마는 ‘차마’ 아이를 쪼개지 못해 양보한다. ‘차마 못 하는’ 마음이 낳은 살려냄이다. 재판은 그때 이미 끝난 것이다. 인간과 나라 존속의 본질이다.

법률과 정치, 시민과 개인 모두 제발 독식을 위해 희생자들과 나라를 더는 쪼개지 마라. 이제부터라도 아이를 살리는 진짜 엄마가 돼야 한다. 아이는 청년들일 수도, 나라일 수도, 이태원 이후의 삶일 수도 있다. 반씩 쪼개어 독식한들 아이만 죽는다. 그럴 때 우리 자신이 보여주었듯 ‘단기적인’ 세월호·산업재해·시민재해·이태원 하나하나는 물론이고 ‘거시적인’ 자살과 저출산 1위, 노인과 청년 빈곤, 지방소멸과 인구소멸, 그리고 끝내 인간소멸과 국가소멸로의 행진은 더욱 빨라질 것이다.

탄핵부터 19대 대선 이후 필자는 승자독식 대신 국민통합과 의회타협을 위한 연대와 연합, 연립정부·통합정부를 간절히 호소했다. 통합적인 국민의사와 진영을 넘은 보수여당 62석, 중도당 38석, 진보야당 6석의 동참 없이는 탄핵은 전연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선 이후 승자독식으로 인해 연대와 통합은 붕괴되고 최악의 진영갈등으로 치달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 참여 이후 세 차례나 승자독식은 절대로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 길이 해법이다. 독식을 위한 충성파와 직계파를 물리치고 통합을 위한 직언파·소신파와 함께하시라. 대통령도 나라도 사는 길이다.

국민 다수의사의 존중도 필수다. 대통령실은 청와대 시대와 용산 시대를 구별한다. 대통령실 이전의 의미다. 그러나 용산시대가 용산의 이태원 참사와 함께 시작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용산의 대통령실과 한남동 관저 중앙에 참사현장이 있다. 정상적 출퇴근길이라면 대통령은 현장을 하루 두 차례씩 지나가게 된다. 큰 고통이다. 따라서 희생자 가족들, 국민과 대통령의 치유를 위해 용산 이전의 타당성과 과정을 차분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거의 모든 조사에서 이전 반대 여론이 더 높았음에도, 이를 강행했을 때는 국민의사 대신 다른 요인이 개입되었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끝내 쪼갬과 독식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나라를 죽이는 가짜 엄마가 될 것이다. 닫힌 두 마음문을 열기 전에는 닫힌 두 현실은 하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가짜 엄마다. 진짜 엄마로의 절대 전환이 없다면 아이와 나라를 살릴 길은 없다. 최고 공직자부터 솔선하시라. 거듭 한국과 세계의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