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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태유의 퍼스펙티브

“경제가 민심이다” 윤 정부는 성장정책에 집중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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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역대 정권은 왜 실패했나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임기 초고공행진을 하던 대통령 지지율이 임기 말에는 반 토막이 났다. 지난 30여년간 6개 정부 모두 그랬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임기 초 지지율은 앞으로 국가를 잘 다스려달라는 국민의 기대와 성원의 표현이다. 임기 말 지지율은 5년간 실적에 대한 민심의 평가이다. 그렇다면 민심이라고 하는 평가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민심의 핵심은 ‘등 따습고 배부른 정도’이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한강의 기적 이래 역대 대통령들의 재임 중 한국의 경제 성장률은 거의 예외 없이 평균 1%포인트씩 하락을 지속해왔다. 경제 성장률 하락 추세와 대통령 지지율 하락 추세는 놀라울 만큼 닮아있다. 지지율 반 토막이 보여준 정권의 실패는 결국 민생의 실패, 경제정책의 실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지난 30여년간 6개 정부서 성장률 평균 1%포인트씩 계속 떨어져
임기 초 고공행진 하던 대통령 지지율도 정권 말기 되면 반 토막
문 정부가 풀어놓은 돈 회수하는 윤 정부, 낮은 지지율은 불가피
정부 주도 기술개발과 수출기업 지원 등 전방위적 산업정책 필요

성장률 하락이 민심이반 초래

퍼스펙티브

퍼스펙티브

정권교체를 초래한 정치적 사건·사고는 단지 겉으로 나타난 증상일 뿐 민심 이반의 근본 원인은 경제이다. 10년 진보 정권이 ‘경제 대통령’을 표방한 보수 이명박 후보에게 500만 표 차로 정권을 넘긴 것은 경제성장률 하락 때문이었다. 10년 보수 정권이 ‘사람이 먼저다’를 외치는 진보 문재인 후보에게 더 큰 표 차로 정권을 넘긴 것 또한 당시 경제성장률이 하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제성장률 하락은 민심이반을 초래하기 마련이니 경제정책의 실패는 정권의 실패이다.

전임 문 대통령 임기 중에도 경제성장률과 지지율은 동반하락을 지속했다. 그러나 임기 후반기의 지지율이 역대 대통령보다 높았던 것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시중에 엄청난 돈이 풀렸기 때문이다. 비록 실물경제는 나빠지고 있었지만, 집값도 주식도 임금도 다 오르고 있어 국민이 경제정책의 실패를 체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금리를 올려 시중에 풀린 과도한 유동성을 회수하고 있다. 물가는 올랐는데 시중에 돈이 마르니 국민의 삶은 고단해질 수밖에 없다. 지난 3년여에 걸친 경제성장률 하락을 한꺼번에 실감케 하는, 마치 치과 치료 후 마취가 풀리는 순간의 통증만큼이나 큰 고통이 일거에 엄습하고 있다.

이때 출범한 윤석열 정부에 대한 국민 지지도가 낮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새 대통령에 대한 기대와 성원보다 당장 백성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그 고통부터 알아달라는 호소와도 같은 것이다.

국민은 패권국 버금가는 나라 원해

문 정부 후반에 돈을 푼 것도 윤 정부 초반에 돈을 회수하는 것은 누구의 잘잘못이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범 세계적인 위기 대처에 한국도 예외일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보수와 진보 간 편 가르기가 아니다. 아직 본격적인 성과가 나오지도 않은 정부 정책에 대한 시시비비 가리기는 더욱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난 30여년간 왜, 보수 정권도 진보 정권도 경제성장률의 대세 하락과 민심이반 그리고 정권교체의 악순환을 피할 수 없었는지 그 원리를 파악하여 미래에 대비하는 것이다.

과거 한때 유엔 가입이 지상 목표였던 후진국 한국 국민의 염원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과 주요 20개국(G20)진입을 넘어 이제는 선진 7개국(G7) 등극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G7으로 만족할 국민이 아니다. 한국인이라면 일본을 꼭 이겨야 하고, 또 중국에는 절대로 지지 않아야 한다. 한국 국민은 세계 패권국에 버금가는 나라를 원하고 있다.

패권국이라고 하면 국토가 작다는 이유로 우리와는 동떨어진 먼 나라의 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와 함께 등장한 최초의 패권국 네덜란드는 한반도의 5분의 1도 안 되는 소국이었다. 글로벌 패권국 영국은 한반도 만한 나라였다.

패권의 비밀은 자유시장 정책

게다가 꼭 혼자 독식하는 독점패권국만 패권국이 아니다. 산업혁명 이래 베네룩스 3국(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이나 스칸디나비아 3국(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등은 독점패권국과 시장을 나누어 지배하는 과점패권국(oligopolistic hegemony)으로 성공한 강소국들이다.

한국이 처한 환경은 물론 유럽 강소국들과는 다르다. 첫째, 유럽 국가들은 산업혁명으로 먼저 자본과 기술을 축적하였기 때문에 자유시장을 통한 경제발전인 ‘내생적 성장’(Endogenous Growth)으로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선진국과의 자본력과 기술력의 현격한 차이로 인해 정부의 정책적 지원 없이는 선진국 기업과 시장에서 자유경쟁이 불가능했다.

둘째, 유럽 강소국들은 강대국의 횡포를 견제할 우방들이 이웃에 있다. 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 유럽연합(EU)의 일원으로서 캐스팅 보트(casting vote) 같은 균형 외교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모든 분야에서 독점적 굴기(崛起)를 추구하는 인구 14억의 중국과, 편협한 역사의식으로 과거의 볼모가 되어 있는 일본 사이에 위치해 함께 연대할 이웃도 없다.

또 첨예하게 대립하는 미·중 패권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당하고 있다. 강소국 한국은 국제경제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자유시장 경쟁만으로는 선진국 대열 진입도 패권국의 꿈도 이루기 힘든 형국이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인류 문명사에는 후발국이 선발국과의 격차를 극복하고 패권국으로 등극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한때 근대 경제를 대표한 패권국 네덜란드는 홀랜트·제일란트·위트레흐트 등 부유한 도시 연합 체제로 출범한 부자나라였다. 당시 유럽의 무역선 2만 척 중 1만5000척이 네덜란드 국적선일 만큼 압도적인 경제력을 갖고 있었다.

자유시장 경쟁으로는 네덜란드 추격이 불가능함을 알아차린 영국은 로버트 월폴 총리 주도로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하고 수출 기업을 정부가 지원하는 전방위적 산업정책인 ‘외생적 성장’(Exogenous Growth)을 창안하여 패권국으로 등극했다.

정부가 뒷받침해야 선발국 추격

신생 독립국 미국도 영국과의 자본력과 기술력 격차를 자유시장 경쟁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어 모릴관세법(Morill Act)으로 대표되는 정부 주도의 외생적 성장으로 영국의 패권을 극복했다. 후발국 독일과 일본, 뒤늦게 산업화에 성공한 한국과 대만, 약진하고 있는 중국도 자유시장에 의한 내생적 성장 위에 정부 정책에 의한 외생적 성장을 통해 경제를 성장시켰다.

자유시장을 버리고, 계획경제만 추구한 공산주의 경제는 예외 없이 몰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자본력과 기술력이 뒤떨어진 후발국이 정부 주도의 외생적 성장 없이 자유시장 경쟁으로 선진국 추격에 성공한 전례 또한 단 한 번도 없었다. 후발국이 선발국을 추격하여 패권국으로 등극하는 비결은 외생적 성장이다.

선발국이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후발국의 외생적 성장을 방해하는 것을 사다리 걷어차기라 한다. 사다리 걷어차기를 국제규범화하여 강제하는 것이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이다. 그러나 중국은 내국 기업 지원과 외국 기업 차별 등 극단적인 외생적 성장전략을 주저하지 않았다. 중국의 이러한 행태를 맹렬히 비난하며 자유무역과 가치동맹을 선언한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도 정도와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외생적 성장전략인 셈이다.

윤 정부의 성패도 경제에 달려

시장 주도의 내생적 성장과 정부 주도의 외생적 성장은 국가발전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다. 국제적으로는 ‘패권의 비밀’이며 국내적으로는 ‘정권의 성공 비결’이다. 과거 진보 정권의 경제적 실패는 정부 정책이 외생적 성장보다 복지를 우선했기 때문이었다. 보수 정권의 경제적 실패는 정부 정책이 외생적 성장보다 시장에 편향되었기 때문이었다.

문 정권이 보수로 교체된 것은 과거 진보 정권의 실패를 답습했기 때문이다. 윤 정권도 과거 보수 정권의 실패를 답습한다면 또다시 진보 정권으로 교체될 것이다. 취임사와 8·15 경축사에서 ‘자유’를 33번씩이나 강조한 윤 정부의 내생적 성장 의지는 충만해 보인다. 이제 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과거 보수 정권의 실패를 거울삼아 외생적 성장에 집중하는 것이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거대 야당은 덩치에 걸맞게 외생적 성장을 위한 입법을 추진해야 한다.

대선이든 총선이든 그 승패를 결정하는 중도층은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다. 오직 경제를 성장시켜 민심을 얻는 정권만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고, 역사에 성공한 정권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