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구하기 어려워졌다” 보험·카드·캐피털사도 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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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랜드 사태가 불붙인 ‘돈맥경화’와 신뢰의 위기가 금융권 전반으로 퍼지고 있다. 증권사를 넘어 보험사와 카드사, 캐피털사 등 제2금융권에도 위험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 보험사는 신종자본증권의 조기상환 일정을 연기하고, 유동성 마련을 위해 고금리 저축보험 상품을 잇따라 출시하고 있다.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캐피털사는 자동차 할부금융 신규 영업을 줄이고 있다.

보험사의 자본 확충 압박은 커지고 있다. 시장금리가 오르고 채권시장에 자금이 마르며 자본 확충을 위해 발행한 신종자본증권 조기상환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 흥국생명이 지난 9일로 예정된 5억 달러 규모의 외화 신종자본증권 조기상환 일정을 연기한 데 이어, DB생명도 오는 13일로 예정됐던 300억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 조기상환 일정을 미뤘다. 신종자본증권에 대한 조기상환이 불발된 건 2009년 우리은행의 후순위채 이후 13년 만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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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자본증권은 영구채(永久債)로 분류돼 회계상 자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보험사가 자기자본비율(BIS)을 높이기 위해 발행을 늘려온 이유다.

한국기업평가에 따르면 내년 중 조기상환 일자가 돌아오는 보험사의 자본성 증권은 4조4000억원 규모다. 내년 2분기에만 2조1100억원의 조기상환 일자가 도래한다. 자체 자금으로 조기상환 자금을 조달하거나 신규 채권을 발행해야 하는데 시장 여건이 여의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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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흥국생명발 신뢰 위기가 현실화하며 한국 기업 등이 발행한 해외채권 가격이 급락하고 있다. 2025년 9월 조기상환 만기인 동양생명 신종자본증권 가격은 지난달 말 83.4달러에서 지난 4일 52.4달러로 떨어졌다. 한국 금융사 등이 발행한 해외채권에 대한 투자심리 악화로 수요가 줄고, 줄어든 수요를 끌어들이려 금리를 더 높일 수밖에 없다.

한국기업평가는 지난 4일 보고서를 통해 “해외 채권시장에서의 한국물에 대한 신뢰도 하락은 불가피해 보인다”며 “흥국생명의 조기상환 연기 사례로 인해 차환 여건이 더욱 악화해 한국 기업의 조기상환 연기 물량이 증가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생명보험 빅3, 연말까지 6조4000억 필요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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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은행의 예·적금 금리 인상도 보험사를 압박하는 요인이다. 저축성 보험의 해약이 증가하며 보험금을 내줄 돈을 마련하기 위한 유동성 자산 수요가 늘어서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빅3 생보사’(삼성·한화·교보)가 연말까지 충당해야 할 자금만 6조4000억원 규모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저축성 보험 해지가 늘면서 자금 수요가 많이 증가한 데다 최근 채권금리 급등으로 중소형사는 물론 대형사도 유동성 관리가 꽤 빡빡해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자금 확충을 위해 연 5%대 고금리 저축보험 상품을 내놓는 보험사도 잇따르고 있다. ABL생명이 연 5.4% 금리 상품을 출시했고, IBK연금보험도 연 5% 저축보험을 내놨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한화생명 등 대형사도 연 5% 중반의 금리를 제공하는 저축보험 출시를 검토하고 있다.

보험업계 고위관계자는 “아직 시중에 풀린 유동성이 많기 때문에 유동성 문제는 고금리 저축보험을 발행해 관리할 수 있는 상황”이라며 “금리 인상으로 보유 채권에 대한 평가손실이 커진 만큼 채권시장이 얼어붙어 추가 채권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 부담 등이 커진 게 더 큰 위험 요인”이라고 말했다.

당국 “내년 새 회계제도 도입, 개선될 것”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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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사와 캐피털사 등 여신전문회사(여전사)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이들 여전사는 수신(예금) 기능이 없어 채권 발행 등을 통해 돈을 빌려야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수신금리를 올려 시중에 풀린 유동성을 흡수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은행이나 저축은행, 보험사 등에 비해 유동성 관리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여전사의 자금 조달 여건은 악화하고 있다. 여전채 금리(AA-, 3년물 기준)는 올해 초 연 2.634%에서 지난 4일 6.285%까지 뛰어올랐다. 카드사와 캐피털사 등이 발행하는 기타금융채 순발행액은 지난해 14조8213억원에서 올해는 7조9133억원(11월 4일 기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신용등급 AAA로 연 5%가 넘는 금리를 앞세운 한전채가 쏟아진 영향이다.

레고랜드 사태로 단기자금 시장이 꽁꽁 얼어붙으면서 기업어음(CP) 등을 통한 자금 조달도 어려워졌다. 91일물 CP 금리는 지난달 19일 4.02%에서 지난 4일 4.88%로 치솟았다. 세계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1월(연 5.0%) 이후 13년9개월 만에 최고를 기록했다.

돈이 마르면 신규 영업을 줄이고, 보유 자산에서 회수한 돈으로 차입금을 갚아야 한다. 이미 일부 카드·캐피털사는 자동차 할부금융 서비스를 줄이고 있다. 여신금융업계 관계자는 “일부 회사는 금리를 높여 사실상 ‘디마케팅’(고객 구매를 의도적으로 줄이는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 당국은 각종 유동성 규제를 일시적으로 완화해 주는 등의 대책을 내놓고 있다. 최대 20조원 규모의 채권시장 안정펀드(채안펀드)를 통해 자금 경색이 심한 여전채 매입도 개시했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보험사의 경우 내년 중 새 회계제도가 도입되는 데다 정부의 대책이 효과를 발휘해 시장의 심리가 안정을 찾으며 상황이 점차 개선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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