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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차이나타운 아줌마의 역주행…예순 양쯔충 인생작 터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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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한 장면. 사진 더쿱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한 장면. 사진 더쿱

다 망해가는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국계 이민자 여성이 멀티버스(다중우주)를 구할 최후의 영웅으로 거듭난다. 올해 예순의 말레이시아계 배우 양쯔충(楊紫瓊·양자경)에게 새로운 전성기를 선사한 미국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원스(이하 에에올)’(감독 다니엘 콴·다니엘 쉐이너트)의 독특한 설정이다. ‘미나리’ ‘미드 소마’ 등 저예산 작가주의 영화 명가 ‘A24’ 배급 작품으로, 지난 3월 미국을 시작으로 전세계에 개봉하며 제작비 1500만 달러의 7배에 달하는 1억 달러 매출을 올렸다. 한국에선 지난달 12일 개봉해 23일 만에 2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5일까지 누적관객수는 22만. 개봉 첫날 박스오피스 7위로 출발해 흥행 역주행하며 현재 4·5위를 오간다.

저예산 SF 코미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주연 #1980년대 홍콩 액션 영화 스타…자신의 인생 역정 드러내

양쯔충 내년 아카데미 여주상 거론 

액션부터 화장실 유머, 황당무계한 SF, 왕자웨이 영화풍의 멜로, 가족 드라마를 넘나드는 이번 영화에서 양쯔충은 변화무쌍하되 중심을 잃지 않은 우아한 연기로 40년 연기 관록을 폭발시켰다는 평가다. ‘007 네버 다이’(1998)의 치명적인 중국 스파이로 할리우드 진출한 지 24년 만의 첫 주연 영화다. 내년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로까지 거론된다. 시상식 결과 예측 사이트 ‘골든더비’에선 독일 최초 메이저 오케스트라의 여성 상임지휘자를 그린 영화 ‘타르’의 케이트 블란쳇에 이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유력 후보 2위로 올라있다.
연출을 맡은 다니엘 콴·다니엘 쉐이너트 감독(‘다니엘스’란 애칭으로 불린다)은 유튜브 조회수 11억 건을 기록한 뮤직비디오 ‘턴 다운 포 왓’(2013), 무인도에 갇힌 남자와 방귀 뀌는 시체의 동행을 그려 선댄스 감독상을 받은 ‘스위스 아미 맨’(2016) 등 평범한 인물들이 연루된 황당무계한 상상력으로 주목받은 신예. ‘에에올’은 이들이 처음에 점 찍은 청룽(成龍·성룡)의 캐스팅이 불발된 뒤, 선망하던 또 다른 액션 스타 양쯔충이 수락하며 만들어졌다. “양쯔충에게 거절당하면 영화는 끝”이란 각오만큼 감독들은 시나리오 전체에 그간 양쯔충의 삶과 필모그래피를 풍부하게 녹여냈다. 양쯔충은 “정말 기발했다. 갑작스런 변화로 우릴 놀라게 하고 각종 말도 안 되는 우주로 데려가지만 깊은 감정을 느끼게 했다”고 영화에 참여한 소감을 밝혔다.

무한 멀티버스 최악의 삶에서 온 구원자

영화의 주인공은 생계에 찌든 고지식한 중년 에블린(양쯔충). 레즈비언인 딸(스테파니 수)의 애인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그는 세탁소가 국세청에 넘어갈 위기에 처한 날, 설상가상 남편 웨이먼드(키 호이 콴)에게 이혼서류까지 받아든다. 인생 바닥을 찍은 순간 우주에서 온 지령을 통해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에블린’들이 사는 무한한 평행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눈뜬 그는 자신만이 그 모든 에블린들의 능력을 한데 흡수해 모든 멀티버스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쿵푸 스타, 성공한 배우, 유능한 셰프, 심지어 인간들의 손가락이 ‘핫도그’인 세상의 레즈비언 등 다른 우주의 에블린들과 달리 그는 삶에 주어진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한 번도 제대로 선택하거나 발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자신의 인생 역정을 고스란히 재현한 양쯔충. 사진 더쿱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자신의 인생 역정을 고스란히 재현한 양쯔충. 사진 더쿱

3개 챕터로 나눠진 영화의 부제이기도 한 어려운 제목은, 바로 자신의 지나쳐온 모든 기회들(Everything)을 깨닫고, 모든 삶의 가능성(Everywhere)을 돌아본 뒤, 이 모든 걸 합친(All at once) 최대 잠재력을 발휘하는 에블린의 여정을 뜻한다. 무수한 삶의 선택지들을 헤치고, 에블린이 택하는 건 바로 곁에 있었으나 소중함을 간과했던 존재들. 바로 가족이다. 더 다정하게 서로를 사랑하며, 행복할 수 있었던.

양쯔충 성공·실패 모두 녹여낸 인생작

영화에선 양쯔충의 지난 삶의 경험들이 빛나게 활용된다. 액션 배우로서 도전과 화려한 성공 이면의 숱한 이주와 실패의 기억들까지 말이다.
그는 말레이시아 화교 집안에서 태어나 4살에 발레를 시작했고, 15살에 변호사 아버지를 따라 영국에 건너갔다. 영국 왕립무용학교 재학 중 “너무 뚱뚱하다”는 발레 선생의 잔인한 선고와 척추 부상으로 꿈을 접었다. 1983년 미스월드 대회 출전을 계기로 이듬해 청룽과 시계 광고를 찍으면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예스 마담’ 시리즈, ‘폴리스 스토리3’ 등 1980~90년대 홍콩영화 전성기의 액션 스타로 활약했다. 하지만 배우 경력을 포기할 뻔한 적도 있었다. 96년 ‘양자경의 스턴트 우먼’을 찍던 중 심각한 허리 부상을 당했다. 당시 그의 열혈팬을 자처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무작정 병문안을 와 팬심으로 응원한 게 연기를 계속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바 있다.

양쯔충이 주연한 1988년 홍콩 액션 영화 '예스 마담-황가사저'. [사진 충북국제무예액션영화제]

양쯔충이 주연한 1988년 홍콩 액션 영화 '예스 마담-황가사저'. [사진 충북국제무예액션영화제]

‘007’ 영화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후 비영어 작품으로 아카데미 최다 후보지명 및 북미 최고 흥행을 거둔 무협영화 ‘와호장룡’(2000)을 비롯해, 뤽 베송 감독의 아웅 산 수치 여사 전기영화 ‘더 레이디’(2011), ‘미이라’ ‘스타트렉’ 등 블록버스터 시리즈에서 액션을 겸비한 강단 있는 역할을 도맡았다. 대체로 비슷비슷한 조연을 전전하던 할리우드에서 그가 재조명된 건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창작자들이 급부상하면서다.

차이나타운 '누빔 조끼 아줌마' 목소리 주고파 

양쯔충과 키 호이 콴이 지난 5월 21일 미국 LA 골드하우스갈라에 참석했다. '에에올'의 에블린의 남편 역을 맡은 키 호이 콴은 '인디아나 존스' '구니스' 등 할리우드 영화에서 아시아계 아역으로 활약했던 배우다. 이번 영화로 성공적으로 영화계에 복귀했다. [AP=연합]

양쯔충과 키 호이 콴이 지난 5월 21일 미국 LA 골드하우스갈라에 참석했다. '에에올'의 에블린의 남편 역을 맡은 키 호이 콴은 '인디아나 존스' '구니스' 등 할리우드 영화에서 아시아계 아역으로 활약했던 배우다. 이번 영화로 성공적으로 영화계에 복귀했다. [AP=연합]

‘크레이치 리치 아시안’(2018)에선 아시아의 재력가,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에선 미지의 아시아계 무림고수 등 서구 관객의 흥미를 끌법한 역할을 했다면 ‘에에올’은 “차이나타운이나 슈퍼마켓에 가면 마주치는 여자. 모든 이민자 여성”을 연기했다. 올초 미국 국영라디오 ‘NPR’과의 인터뷰에서의 발언이다. 패션지 ‘엘르’와 지난달 인터뷰에서는 “우리 엄마가 이 영화를 보더니 ‘넌 왜 항상 영화배우로 보이지 않니? 너무 늙고 지저분해 보여’라고 한 게 기억난다”면서 “차이나타운에 가면 빨간 누빔 조끼를 입은 여성들이 보인다. 가족을 돌보느라 바빠서 자기를 돌볼 시간이 없고 당신이 그냥 지나칠 법한, 그런 여성들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목소리가 없는, 결코 슈퍼히어로가 아닌 그 여성들을 현실에 발붙인 영화의 주인공으로, 스크린 속에 살려내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시아계 이민자 출신인 다니엘 콴 감독의 의도와도 상통한다. 콴 감독은 “이 영화는 결국 소란 속에서 가족과 다시 함께하려는 엄마에 관한 영화”라면서 “처음부터 이민자의 이야기를 담을 의도는 아니었지만, 다중우주에선 각종 가능성과 후회를 느끼게 된다. 이민자들도 그런 위험을 감수한다”고 말했다. 이화정 영화 저널리스트는 “실제 이민 2·3세가 자신의 부모 세대를 그리면서 기존 미국 영화의 전형적인 캐릭터와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며 “양자경은 다양한 역할을 해야 하는 멀티버스 영화에서 그간 해온 연기를 총망라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진지한 연기로 아시아계 이민자를 희화화하지 않고 실감 나게 그려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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