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60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낸 산문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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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해 시인의 자택 서재에는 조병화 시인이 써준 글씨 '일일일생일망'이 걸려 있다. 하루에 하나씩의 (생겨나는)번뇌를 잊는다는 뜻이다. 시인은 산문집 『시가 있으므로 세상은 따스하다』에 1960년대 여러 선배 시인들과 함께 겪은 다양한 이야기를 담았다. 사진 북레시피

김종해 시인의 자택 서재에는 조병화 시인이 써준 글씨 '일일일생일망'이 걸려 있다. 하루에 하나씩의 (생겨나는)번뇌를 잊는다는 뜻이다. 시인은 산문집 『시가 있으므로 세상은 따스하다』에 1960년대 여러 선배 시인들과 함께 겪은 다양한 이야기를 담았다. 사진 북레시피

평생 시만 써온 81세 시인이 생애 첫 산문집을 냈다.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낸 김종해 시인이 최근 펴낸 『시가 있으므로 세상은 따스하다』(북레시피)다.

한국시인협회장 지낸 김종해 시인 #『시가 있으므로 세상은 따스하다』 펴내

시인은 1963년 월간 자유문학 신인문학상(당선작 '저녁')을 받으며 등단했으나 같은 해 8월 잡지가 폐간되면서 활동 무대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내란')로 재등단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나 지금까지 열두 권의 시집을 냈을 뿐 산문집은 낸 적이 없다. 시인은 시로 말할 뿐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산문집은 내지 않겠다는 지론 때문이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인 북레시피 김요안 대표가 "아버지의 짧은 글들에 남아 있는 한국 현대 시인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그냥 묻어두기에는 너무 아깝다"며 여러 차례 설득한 끝에 산문집을 내게 됐다. 그동안 신문이나 문예지에 발표했던 글들을 빠짐없이 모았다. 이번 산문집을 위해 새로 글을 써 보태지는 않았다고 한다.

술취해 박목월에게 호통친 추억, 이어령 시집 낸 기억 등 

 『시가 있으므로 세상은 따스하다』

『시가 있으므로 세상은 따스하다』

산문집에 등장하는 일화의 주인공들은 박목월·조지훈·박남수 같은 사람들이다. 41년생인 김종해 시인에겐 한 세대 선배뻘 되는 시인들이다. 당시 기준으로 까마득한 후배가 겪은 선배들 혹은 선생님들 이야기인 셈이다. 술깨나 마신다고 자부하던 시인은 딱 한 번 취해서 박목월 시인에게 대들었다고 한다. "목월 선생, 할 말 있소!"하고 소리를 친 뒤 기억을 잃었는데, 다음날 사과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가 박목월 시인으로부터 "그래, 닌 술을 고거밖에 못 마시나, 우째 그래 주량이 작노?"라는 애정 어린 답변을 들은 일화는 책에 여러 번 등장한다.

시인에 따르면 고 이어령 선생이 시를 쓰게 된 것도 그의 권유 때문이다. "이어령의 최초 시집은 나의 권유를 받아들여 나왔다"고 '나의 문학 요람을 흔들어주었던 이들'이라는 글에 썼다. 그가 운영하는 문학세계사 출판사에서 2008년 8월 출간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가 고 이어령 선생 생전의 유일한 시집이다.

1966년 덕수궁 실외찻집에서 열린 김종해 시인의 첫 시집 『인간의 악기』 출판기념회. 맨 오른쪽 미당 서정주 시인이 축사하고 있다. 왼쪽과 가운데는 김종해 시인 부부. 사진 김종해

1966년 덕수궁 실외찻집에서 열린 김종해 시인의 첫 시집 『인간의 악기』 출판기념회. 맨 오른쪽 미당 서정주 시인이 축사하고 있다. 왼쪽과 가운데는 김종해 시인 부부. 사진 김종해

산문집은 생전 각별했던 동생 고 김종철(1947~2014) 시인, 형제의 정서의 뿌리인 어머니, 어린 시절 부산 생활 등 시인의 지금을 만든 세월과 사람들의 이야기도 비중 있게 다뤘다. 두 번의 등단 모두 자신의 이름이 아닌 이름으로 등단했다는 사연도 소개했다. 자유문학 응모작은 남궁해라는 이름으로 했다고 한다. 당시 '남궁'이라는 성을 가진 시인이 많아서 자기 이름의 '해'자를 붙여 응모자 이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신춘문예에는 당시 갓 태어난 첫째 아들 이름인 '김요일'로 응모했다.

"시인이(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시인이 공들여 쓴 '난해시'는 결코 좋은 시가 되지 못한다"며 이해 어려운 요즘 시를 질타한 대목도 나온다. "내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라고 모아 낸, 시를 위한 에세이"라며 "내 문단 생활 평생 첫 산문집인데, 마지막 산문집이기도 하다"고 했다.

4시 40분 기상, 주 3회 운동하고 출근해 시 궁리하는 81세 시인

시인은 지금도 매일 오전 4시 40분에 일어난다. 8시 40분이면 서울 마포구 신수동 출판사 사무실로 출근해, 온종일 시에 대해 생각하다 퇴근한단다. 오후 5시부터 7시 사이를 '술시'라 부르며 이른 저녁과 반주를 빼먹지 않을 정도로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김씨는 "동생(김종철 시인), 아들(김요일 시인)과 함께 시인으로 사는 인생은 복 받은 인생이었다. 지금도 나에겐 시가 전부"라며 "내년쯤 시집을 계획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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