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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에 질려 사람 밟는다? 노이즈 뒤 '군중지진' 벽도 무너뜨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대규모 군중이 몰려들며 발생하는 ‘군중 압착(crowd crush)’ 사고는 1990년대 이후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도시로 인구가 집중하고 운송 수단이 발전하면서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리지 않고 발생합니다.

[정글]

2015년 9월 사우디 메카로 향하는 자마라트 다리 교차로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 집계 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2300명이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AP=연합뉴스

2015년 9월 사우디 메카로 향하는 자마라트 다리 교차로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 집계 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2300명이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AP=연합뉴스

독일 막스플랑크 인간개발연구소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매년 평균 380여 명이 군중 압착 사고로 사망합니다. 역대 최악의 사고는 2015년 9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성지 메카에서 일어났습니다. 당시 23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형 사고를 막기 위해 과학자들은 40여 년에 걸쳐 군중 역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사고 원인을 파악하는 건 매우 복잡합니다. 장소의 구조, 행사의 성격, 군중의 행동, 관리 책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니까요.

하지만 군중이 몰려드는 단계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단계로 전환되는 메커니즘은 어느 사고나 비슷합니다. 여기엔 심리적인 특성보다는, 역학적이고 물리적인 특성이 강하게 작용합니다.

참사를 예고하는 ‘군중 지진’

2010년 7월 24일 독일 뒤스부르크에서 열린 뮤직 페스티벌 ‘러브 퍼레이드’에 100만명이 넘는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군중은 행사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좁은 터널을 지나 행사장으로 통하는 교차로에 합류해야 했습니다.

2010년 당시 러브퍼레이드 행사장으로 진입하려는 사람들. 양측에서 나온 사람이 합류하는 지점인 사진 뒷쪽의 군중 밀도는 극단적으로 높았다. 이 부근에서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진 아르네 뮈젤러

2010년 당시 러브퍼레이드 행사장으로 진입하려는 사람들. 양측에서 나온 사람이 합류하는 지점인 사진 뒷쪽의 군중 밀도는 극단적으로 높았다. 이 부근에서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진 아르네 뮈젤러

240m 길이의 터널 안은 좁았습니다. 1시간쯤 지나자 군중 밀도는 급격하게 올라갔습니다. 터널을 빠져나온 뒤 행사장으로 올라가는 길은 반대편에서 온 사람과 뒤섞여 더 혼잡했죠.

테크노 음악이 크게 울려 퍼졌고 많은 군중이 술에 취해 있어 경찰 통제가 먹히지 않았습니다. 군중 틈에 끼인 사람들은 벽을 타고 올라가거나 구조물 위로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목숨의 위협을 느낄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군중 압력에 정신을 잃는 사람이 속출했습니다. 결국 21명이 사망하고 651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고는 2000년대 유럽에서 처음 터진 대형 압사 사고였습니다. 유럽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죠. 군중 사고를 전문적으로 연구해 온 스위스 취리히연방공과대학의 컴퓨터 사회과학자 디르크 헬빙 교수는 사고 발생 메커니즘을 밝히기 위해 당시 현장 영상을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분석했습니다.

헬빙 교수는 “다른 사람을 해할 의도가 없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왜 이런 사고가 발생하는지 답을 찾기 위해 메커니즘을 분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군중 압착 사고에 대한 가장 큰 편견은 사고가 ‘패닉’에 빠진 사람들 때문에 생긴다는 관점”이라고 했습니다. 이어 “사고 대부분은 심리적 이유보다는 좁은 장소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리는 ‘물리적’ 이유로 생긴다”고 했습니다.

이태원 사고 직전의 거리 모습. 군중 밀도가 극단적으로 높아진 것으로 확인된다. 밀도가 ㎡당 6~7명을 넘으면 ‘군중 난류(군중 지진)’가 발생해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상황이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다. 사진 연합뉴스

이태원 사고 직전의 거리 모습. 군중 밀도가 극단적으로 높아진 것으로 확인된다. 밀도가 ㎡당 6~7명을 넘으면 ‘군중 난류(군중 지진)’가 발생해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상황이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다. 사진 연합뉴스

헬빙 교수는 군중 사고가 ‘군중 난류’ 혹은 ‘군중 지진’이라는 현상 때문에 생긴다고 했습니다. 군중 밀도의 증가, 군중 흐름의 변동 같은 물리학적 시각으로 군중 재난을 바라본 것이죠. 이전까지는 계량하거나 예측하기 힘든, 이른바 ‘패닉’과 같은 인간 심리를 사고 원인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군중 밀집’의 3가지 단계

헬빙 교수는 군중 개개인의 위치와 움직임을 각각 추적해 군중 흐름의 변화를 파악했습니다. 그 결과 군중 이동은 3가지 국면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첫 국면에서 군중은 목적지로 향하는 일정하고 균일한 흐름을 만듭니다. 어떤 위협도 감지되지 않죠.

군중 밀도가 증가하면서 흐름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두 번째 국면으로 전환됩니다. 이때 ‘노이즈’가 발생합니다. ‘노이즈’는 군중 속 일부가 초조함이나 조급함 때문에 보행 방향을 자주 바꾸는 걸 의미합니다. 밀집한 상태로 천천히 움직이는 군중 속에서 앞지르기를 시도하는 것이 ‘노이즈’입니다.

밀집한 군중 속에서 공간은 ‘희소한 자원’이 됩니다. 이 때문에 이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는 것이죠. 우발적인 개인 행동으로 군중의 전체적인 흐름이 뚝뚝 끊기는 일이 생깁니다.

여기서 밀도가 더 높아지면 세 번째 국면인 불규칙적 흐름으로 전환됩니다. 보통 1㎡당 6~7명을 넘으면 생기죠. 국지적으로는 밀도가 훨씬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1㎡ 안에 10명 넘게 들어가기도 합니다.

이 국면에선 사람 간에 의도치 않은 신체접촉이 강하게 발생합니다. 사람들은 숨 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완전히 무작위적인 움직임이 관찰됩니다.

이렇게 군중이 불규칙적이고 무작위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현상을 ‘군중 난류(crowd turbulence)’ 혹은 ‘군중 지진(crowd quake)’이라고 부릅니다.

돌이킬 수 없는 ‘군중 지진’

‘군중 지진’ 단계에선 사람들이 서로 심하게 밀착되면서 완전히 한 덩어리가 된 유체처럼 움직입니다. 개별적으로는 각 방향으로 움직여도 전체적으로는 물처럼 출렁이는 것처럼 보이죠. 이 때문에 군중 간 압력은 멀리 떨어진 사람까지 전달될 수 있습니다. 군중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떠밀리며 때로는 몇 미터씩 이동할 수도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군중을 관찰한 비디오를 보면 군중은 유동적인 액체처럼 움직입니다. 어느 한 곳에서 시작된 충격이 파문을 일으키며 전달되기도 합니다. 이는 특정인이 의도한 힘 때문이 아니라 군중이 서로 뭉쳐져 유체처럼 움직이기 때문이죠.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신체를 움직일 수 있는 존재지만, 군중 밀도가 높아지면 서로 한 덩어리가 돼 움직이는 현상이 나타난다. 개별 입자이기보다 유체처럼 흐름에 따라 떠밀리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신체를 움직일 수 있는 존재지만, 군중 밀도가 높아지면 서로 한 덩어리가 돼 움직이는 현상이 나타난다. 개별 입자이기보다 유체처럼 흐름에 따라 떠밀리게 되는 것이다.

‘군중 지진’이 생기면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압력이 폭발적으로 가해집니다. 군중의 물리적 상호작용이 더해지면 강철판을 구부리거나 벽돌로 된 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인 최대 4500N/m의 힘을 일으킵니다. 사람을 몇 미터 내던지고, 옷을 찢을 수 있는 힘이죠.

이 단계에 이르면 단지 몇 사람이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것만으로 참사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대륙판이나 암석판이 서로 맞부딪히면 밀도가 너무 커져서 작은 균열만으로 지진이 일어나는 것과 같죠.

한번 ‘군중 지진’이 생기면 돌이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넘어집니다. 넘어진 곳에 생긴 공백 때문에 지탱할 곳이 없어진 옆 사람도 그 위로 넘어질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도미노 현상’이 발생합니다.

헬빙 교수는 “군중 지진이 한번 일어나면 통제 인력이 수백 명 투입돼도 바로 해소하기가 불가능하다. 이럴 땐 즉시 인근 병원에 연락해 다수 사상자 발생에 신속하게 대비해야 한다”며 “중요한 건 ‘군중 지진’ 현상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게 막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디르크 헬빙 스위스 취리히연방공과대학교 교수

디르크 헬빙 스위스 취리히연방공과대학교 교수

디르크 헬빙(Dirk Helbing) 교수는 군중 역학 분야를 선도하는 사회과학자입니다. 헬빙 교수는 2010년 독일에서 일어난 러브 퍼레이드 사고의 원인을 다각적으로 분석해 ‘군중 지진(군중 난류)’이라는 개념을 처음 내놓았습니다. 군중 관리 분야의 과학화에 크게 기여한 그의 연구 결과는 유럽 각국의 군중 사고 예방과 모델링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지난 2일 저녁 헬빙 교수와 화상으로 인터뷰했습니다.

군중 압착 사고의 공통적 원인은 무엇인가요
“사고는 군중 난류 혹은 군중 지진이라는 현상 때문에 발생합니다. 우선 군중 밀도가 너무 높아져 군중 간의 비자발적인 신체 접촉이 빈번해집니다. 압력은 신체에서 신체로 전달되죠. 불규칙적인 힘은 군중의 움직임에 난류와 같은 패턴을 만듭니다. 때로 이 힘은 벽돌로 된 벽을 무너뜨릴 정도입니다. 이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균형을 잃습니다. 넘어지고 밟히는 일이 벌어집니다. 결과적으로 ‘도미노 현상’이 발생하면서 사람들이 넘어지고 포개집니다. 사람들은 질식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당할 수 있습니다.”
심리적 요인은 없나요
“널리 퍼진 대중적 편견은 패닉 탓에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공황에 빠진 사람들이 겁에 질려 도망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밟는다는 생각하는 사람이 많죠. 원론적으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군중 사고는 이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심리보다 물리적 힘이 비극을 초래합니다. 군중 사고는 사람들이 공황에 빠지거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려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닙니다. 사실 많은 사고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도우려고 합니다.”
한국 지하철역의 군중 밀도도 엄청납니다. 하지만 왜 거기서는 군중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지하철역은 매일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동선 분리도 염두에 둔 구조죠. 핼러윈의 이태원은 단순히 보행자가 많아서 그런 게 아니라 보행자 흐름의 분리가 안 됐기 때문에 최악의 조건이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T자 모양의 교차로에 다양한 방향으로 가는 보행자가 한꺼번에 합류하는 환경이었습니다. 거기에 클럽 앞에서 대기하는 인원도 있었고, 아래쪽에 길이 좁아지는 구조이기도 했습니다.”
군중 사고는 후진국형 사고가 아닌가요
“군중 사고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쉽게 일어납니다. 군중 밀도가 어느 한계를 넘어 ‘군중 지진’ 현상이 나타나면 사고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괜찮아 보이는 상황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까지 얼마나 순식간에 바뀔 수 있는지를 알면 깜짝 놀랄 겁니다. 때때로 그런 일은 10분도 안 되는 사이 일어납니다.”
막을 방법은 없나요
“전조 현상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가로막혀 앞으로 나아가는 게 어려우면 이미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통행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붕괴되고 양방향 보행자 진행이 분리가 안 되면 비상 상황으로 금세 급변할 수 있습니다. 양 옆 사람들이 눌리고 자기 몸 움직임을 스스로 통제하기 힘들게 되면 상황은 매우 치명적으로 변합니다. 이런 일이 관측되면 즉시 미리 마련한 비상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임기응변식 대응은 사태를 악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사전에 어떤 조치가 필요한가요
“군중 밀도를 높아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입니다. 병목이나 교차로, 모여듦, 보행 동선의 엇갈림 등이 안전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이런 일을 최대한 막아야 합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잠재적으로 치명적일 수 있는 장소를 미리 파악해 둬야 합니다. 상황이 심각해지기 전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죠. 늘 군중을 한 방향으로 통행시키는 게 권장됩니다.”
독일 정부는 러브 퍼레이드 사고 후 어떻게 했나요
“독일은 이벤트 장소나 조직을 위한 안전 규정을 매우 상세하게 만들어놨습니다. 시뮬레이션을 사전에 돌려보고 상황을 예측해서 대책을 마련해 놓는 게 아주 일반적인 일이죠. 최근엔 군중과 상호작용하는 스마트폰 앱을 통해 군중 안전을 지원하는 일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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