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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성 좇는 ‘진보의 시대’는 끝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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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호 20면

회복력 시대

회복력 시대

회복력 시대
제러미 리프킨 지음
안진환 옮김
민음사

“진보의 시대 전체를 이끈 시간적 지향의 근본은 ‘효율성’이다. 즉 천연자원의 착취와 소비와 폐기를 최적화하고, 그렇게 해서 자연 자체가 고갈돼도 사회의 물질적 풍요를 점점 더 빨리 증진한다는 임무다. (중략) 바로 이것이 우리를 지구의 지배적인 종으로 그리고 지금은 자연계의 파멸로 이끌었다.”

초반의 이런 단언에서 짐작하듯, 제레미 리프킨의 새 책 『회복력 시대』는 지금의 인류 문명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 핵심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다. 저자는 기후변화나 바이러스 창궐을 언급하며 이렇게 진단한다. “우리는 오랜 세월 자연계를 인간 종에 적응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자연계에 적응해야 하는 굴욕적인 운명을 직면하고 있다. 인간 종은 현재 주변에서 벌어지는 대혼란에 대책이 없는 상태다.”

저자는 숲속 학교, 숲속 유치원 등 자연 애착을 키우는 교육을 강조한다. 사진은 올해 어린이날 부산진구청의 ‘숲 밧줄 놀이터’. 송봉근 기자

저자는 숲속 학교, 숲속 유치원 등 자연 애착을 키우는 교육을 강조한다. 사진은 올해 어린이날 부산진구청의 ‘숲 밧줄 놀이터’. 송봉근 기자

이 책은 저자가 ‘진보의 시대’ 혹은 ‘화석연료의 시대’라고 부르는 지금의 산업 시대에 인류가 지구의 각 권역을 어떻게 착취하고 통제해왔는지 구체적 사례와 현상을 통해 보여준다. 쉬운 예가 녹색혁명의 퇴보다. 빨리 자라는 다수확품종 덕에 휴경 없는 재배가 가능해졌지만 토양의 유출과 영양소 고갈을 초래해 결국 비료와 살충제를 더 쓰면서도 생산량 증가는 이에 못 미치게 됐다. 특히 화석연료는 산업시대 내내 워낙 싼 값에 공급돼 효율성 계산에 중시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1960년대 3달러였던 석유의 배럴당 가격은 2008년 7월 147달러까지 치솟았다. 저자는 직후의 세계 금융위기를 화석연료 중심의 경제가 멈추면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란 가상경제도 유지하기 힘들어진 것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나아가 시간과 공간, 특히 유전자나 자기장 같은 영역까지 인간의 통제와 효율성이 어떻게 영향을 미쳐왔고 문제는 무엇인지 짚는다.

이 책은 이에 앞서 효율성이 ‘진보의 시대’의 대표적 정신으로 자리 잡은 과정부터 풀어나간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이나 공학적 개념인 ‘효율성’을 생산에 도입한 테일러주의, 뉴턴의 평형이론과 19세기 후반 등장한 열역학 법칙 등 역사·경제·과학을 아우르는 전개가 감탄을 부른다. 경제학에 대한 질타도 이런 식이다. “기존 경제학의 치명적인 결함은 시간이 가역적이라는 뉴턴식 평형 세계관에 여전히 묶여 있다는 것이다. 판매자와 구매자 간 상품이나 서비스, 재산 거래 등 모든 경제적 교환을 시간을 초월한 진공 상태에 가둠으로써 경제학자와 재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편리하게 무시할 수 있다.” 거칠게 옮기면, 효율성만 중시하다 장기적 문제를 간과했단 것이다. 저자는 열역학 법칙을 이에 대비시키며 “가용 에너지에 대한 모든 착취가 단기적 이익을 주지만 장기적으로 더 큰 엔트로피 손실을 대가로 치르게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진보의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며 ‘회복력의 시대’를 내세운다. 이는 효율성에서 적응성으로, 국내총생산에서 삶의 질 지수로, 수직 통합형 규모의 경제에서 수평 통합형 규모의 경제로, 세계화에서 세방화로, 대의민주주의에서 분산형 동료 시민정치로 등의 이행을 의미한다. 저자는 특히 인간 몸속의 세포나 원자의 교체, 인체에 공존하는 박테리아·미생물·바이러스의 엄청난 규모 등을 언급하며 인간 종과 개별적 인간이 모두 일종의 생태계란 점을, 외부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군계·생태계·지구 권역”이 연장된 “개방적 시스템”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이를 통해 기존의 배타적 ‘자유’ 개념이나 인간을 자율적 주체로 여기는 관점 역시 뒤집는다. 책은 ‘타자’에 대한 개방성과 취약성이 오히려 회복력의 중요한 면면임을, 또 ‘자연애’를 강조하고 진화 과정과 공감의 역할을 새로 조명하며 “다른 모든 생물 종과 마찬가지로 인간 종의 본질적 욕구는 지배가 아닌 번성”이란 점을 설파한다.

이 책은 효율성과 생산성의 향상에도 노동시간 단축이나 임금 인상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를 비롯해 지금 시대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진단에서 강렬하고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반면 책에 담긴 미래의 전망은 제대로 이해하는데 추가적 공부나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예를 들어 구글·페이스북 등 IT 대기업 플랫폼에 대해 “이런 글로벌 독과점이 장기적으로 우세할 것 같지는 않다”라거나, 우버·에어비앤비 등이 서비스 접근에 일종의 통행세를 거두며 자본주의 네트워크화된 것에 대해 “이런 유형은 장기적으로 유지될 가능성이 없다”는 저자의 시각은 디지털 경제를 지나치게 낙관하는 건 아닌지 의구심도 든다. 또 농촌 인구가 급감하는 한국 현실과 달리, 디지털 경제에서 물류비용 감소로 “농촌 지역사회가 인구 5만~20만 정도의 중소 스마트 도시와 함께 부활하고 번성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본 것도 눈에 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직면한 미래의 모호함은, 이 책이 회복력 시대의 특징으로 강조하는 ‘적응성’을 더욱 주목하게 한다. 예측할 수 없는 변화, 이른바 ‘알려지지 않은 모르는 것’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이 책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와도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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