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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도 팔 걷어붙였다…이태원서 숨진 고려인 '극적 고국행'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4일 정오쯤 강원도 동해국제여객터미널. 흰색 운구차가 카페리 이스턴드림호에 오르자 그 뒤를 따라 푸른 점퍼의 60대 남성이 눈가를 훔치며 배 안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지난달 29일 밤 이태원에서 세상을 떠난 고려인 박 율리아나(25·여)는 아버지와 함께 러시아로 떠났다. 증조부의 나라에서 보낸 박 율리아나의 1년 6개월은 그렇게 끝났다.
 박 율리아나는 지난해 4월 러시아 나홋카시(市)를 떠나 한국에 왔다. 어학원과 유치원에서 러시아어와 영어를 가르치던 그는 인기 만점 교사로 통했다고 한다. 지난달 29일 저녁 “핼러윈 축제에 다녀오겠다”며 지인들에게 메시지를 남긴 그는 몇 시간 뒤 이태원 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30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2019년 입국해 경기도 안성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아버지는 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오열하며 용인 장례식장으로 달려왔다.

박 율리아나(25)는 지난달 29일 이태원역 근처에서 인파에 휩쓸려 참변을 당했다. 지난달 31일 고인의 아버지가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방문한 뒤 경찰에 부탁해 찍은 사진. 사진 유족

박 율리아나(25)는 지난달 29일 이태원역 근처에서 인파에 휩쓸려 참변을 당했다. 지난달 31일 고인의 아버지가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방문한 뒤 경찰에 부탁해 찍은 사진. 사진 유족

 아버지는 딸이 고향에 묻히길 원했지만 갈 길이 첩첩산중이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지난 3월 인천~블라디스보스토크 항공편이 끊겼다. 다행히 1주일에 한 번씩 동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는 카페리가 남아있었지만, 장거리 운구를 위해선 특수 방부처리를 해야 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아버지는 장례대행업체로부터 “방부처리에 450여만원이 들고 선박 이송과 운구차 이용 등을 위해선 600여만원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나홋카시로 다시 시신을 옮기는 비용도 감안해야 했다. 정부가 약속한 위로금 2000만원과 최대 1500만원의 장례 비용에 기대보려 했지만, 지급까지 최소 1주일이 걸린다는 말에 고개를 떨궜다. 블라디보스토크행 선박의 출항일(4일)이 다가올수록 아버지는 안절부절못했다.

러시안 커뮤니티는 박 율리아나의 시신을 고국으로 송환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진행했다. 사진 유족

러시안 커뮤니티는 박 율리아나의 시신을 고국으로 송환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진행했다. 사진 유족

 박 율리아나를 위해 러시안 커뮤니티가 지난 2일 시작한 모금 운동이 소셜 미디어(SNS)와 언론보도로 알려졌고 온정이 답지하면서 길이 열렸다. 회사원, 경찰관 등 일반 시민들은 물론 금융권에서도 팔을 걷어붙였다. 이틀 만에 모금액이 1000만원을 넘어섰다. 200만원을 후원한 회사원 오승수(63)씨는 “평소 동남아 아이들을 후원하면서 고려인도 생각하고 있었다”며 “박 율리아나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돕고 싶다는 생각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러시아 대사관도 지난 3일 총영사를 서울 용산구청에 보내 박 율리아나 유족의 지원금 신청을 도왔다고 한다.

이영애도 힘 보탠 율리아나 모금 운동 

지난 3일 인천 함박마을 종합사회복지관에선 박 율리아나를 기리는 추도식이 열렸다. 박 율리아나도 생전 고려인 약 5000여명이 사는 함박마을에 머물렀다. 어학원 제자인 A군은 “율리아나 선생님은 항상 친절하게 잘 가르쳐주셨다. 소식을 듣고 펑펑 울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며 울먹였다. 동료 교사는 “실종 소식을 듣고 제발 아니길 바랐지만, 더는 볼 수 없게 됐다”며 “율리아나가 고국으로 무사히 갔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3일 오후 5시 인천 함박마을 종합사회복지관에서는 이태원 참사로 사망한 박 율리아나의 추도식이 열렸다. 심석용 기자

3일 오후 5시 인천 함박마을 종합사회복지관에서는 이태원 참사로 사망한 박 율리아나의 추도식이 열렸다. 심석용 기자

 이날 오후 8시쯤엔 한국장애인재단 관계자 3명이 추도식 장소를 찾았다. 이들은 배우 이영애씨를 대신해 유족에게 편지와 후원금 1000만원을 건넸다. 이씨는 한국장애인재단에서 문화예술 분야 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씨가 자필로 적은 뒤 다시 타이핑했다는 A4용지 한장 분량의 편지엔 “수천만의 언어가 있다 해도 아버님의 슬픔을 함께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님은 힘내셔야 한다. 그래야 하늘에 있는 율리아나가 아버님을 지켜보며 웃을 것이다”라는 내용이 적혔다고 한다. 한국장애인재단 관계자는 중앙일보에 “이영애씨가 재단을 통해 박 율리아나의 귀국을 돕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며 “편지에는 이태원 참사로 희생당한 분들에 대한 조의의 뜻이 담긴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외국인 피해자 위한 대책 필요”

 하지만 모든 외국인 참사 피해자가 방도를 찾은 건 아니다. 외교부 등에 따르면 이태원 참사로 사망한 외국인 26명 중 현재 시신이 본국으로 운구된 인원이 5명, 한국에서 장례를 치른 인원이 2명, 운구 날짜가 정해진 인원이 12명이다. 나머지 7명은 본국 가족과의 연락은 닿았지만 여러 이유로 일정은 정하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

이란인 유학생 A가 대표적이다. A의 가족은 한국에 있는 A의 친구들을 통해 A의 시신을 운구하겠단 뜻을 밝혔지만, 현재까진 상황이 여의치 않다. A의 지인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란에 있는 A의 부모가 매일 전화해 상황을 묻는데 주한 이란대사관으로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해 한숨만 쉬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 관계자는 “이란의 경우 외교적 문제 등으로 유족들이 의사소통 과정에서 답답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면서도 “현재는 문제가 해결돼 조만간 운구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지적이 이어지자 외교부는 서울시 등과 협의해 외국인 사망자 유가족에 대한 지원금 지급 기간을 단축했다고 4일 밝혔다. 기존엔 1주일가량 걸리던 수령 기간을 외국인 피해자에겐 단축해 이르면 신청 후 3일 안에 지급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따라 박 율리아나 유족도 정부 지원금을 수령했다고 한다. 율리아나의 부친 박 아르투르는 전날 통역을 통해 “상황이 다른 외국인 피해자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호소한 뒤에 이뤄진 조치다. 법무부는 외국인 참사 피해자 가족 중 국내 입국을 희망하는 이들을 위해 입국절차를 간소화하기로 했다. 한국에 무비자 입국을 할 수 있는 나라의 유가족엔 전자여행허가(K-ETA)를 받는 절차를 없애고 비자가 필요한 나라는 인천공항에서 도착해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참사 초기부터 외국인 유족에 1대1 전담관을 매칭해 대응했다”며 “피해자들이 불편을 겪는 일이 없도록 관계기관과 논의해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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