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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버린 안네의 일기, 채우고 싶었다" 단짝친구 마지막 미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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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2월 4일 하나 피크-고슬라어의 생전 모습. 당시 69세였던 그는 '안네의 일기' 저자 안네 프랑크의 단짝 친구로 홀로코스트 만행을 증언해왔다. AP=연합뉴스

1998년 2월 4일 하나 피크-고슬라어의 생전 모습. 당시 69세였던 그는 '안네의 일기' 저자 안네 프랑크의 단짝 친구로 홀로코스트 만행을 증언해왔다. AP=연합뉴스

하나 피크-고슬라어는 안네 프랑크의 처음이자 마지막 친구였다. ‘안네의 일기’에 등장하는 안네의 친구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고슬라어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자택에서 숨졌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3일 보도했다. 94세. WP는 “안네 프랑크의 살아 있는 연결고리이자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된 150만 유대인 어린이를 기억하는 수호자로 전 세계를 다녔다”며 그를 추모했다. 둘의 사연은 지난해 ‘내 친구 안네 프랑크’ 영화로 제작됐고, 고슬라어가 생전 작성한 동명의 회고록도 안네의 94번째 생일을 기념해 내년 6월 출간될 예정이다.

안네, 은신 도중 친구 꿈…일기엔 “구해주세요”

고슬라어는 1928년 11월 12일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이마르 정부에서 언론 담당 차관을 지내다가 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자 가족을 데리고 네덜란드로 도피했다. 엄마를 따라간 동네 슈퍼마켓에서 똑같이 독일에서 왔다는 안네 가족을 처음 만났을 때 안네는 4살, 고슬라어는 5살이었다. 활달한 안네와 내성적인 고슬라어는 반대 성격이었지만, 옆집에 살면서 유치원과 학교, 집에서까지 종일 붙어 지냈다.

2016년 4월 19일 콜롬비아의 국제 책 전시회에서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전시돼있다. AFP=연합뉴스

2016년 4월 19일 콜롬비아의 국제 책 전시회에서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전시돼있다. AFP=연합뉴스

가족끼리도 자주 교류해 안식일을 함께 지내곤 했다. 안네는 고슬라어의 애칭인 ‘하넬리’로 그를 부르면서 42년 6월 15일 일기장에 “하넬리 고슬라어, 집에선 거리낌 없이 말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선 내성적”이라고 썼다. 고슬라어는 훗날 인터뷰에서 “안네는 활기차고, 조숙하고, 남자를 좋아하는 불같은 아이였다”고 회고했다.

40년 5월 나치가 네덜란드를 침공하자 안네와 고슬라어는 강제로 유대인 학교에 다녔다. 프랑크 가족이 42년 6월 은신하면서부터는 안네와 고슬라어도 서로의 생사를 알지 못했다. 안네는 은신 생활 중 일기장에 ‘하넬리’에 대해 여러 차례 쓰면서 오랜 친구에게 더 잘해주지 못했다고 후회했고, 자신만 안전하게 숨어지내고 있다는 죄책감도 고백했다. 고슬라어 가족은 43년 6월 20일 체포돼 웨스터보크 임시수용소를 거쳐 이듬해 2월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이송됐다.

안네는 일기에 고슬라어 꿈을 꾼 이야기도 남겼다. 안네는 43년 11월 27일 일기에서 “(꿈에서) 누더기를 입고 얼굴이 야윈 그녀(하넬리)를 봤다”면서 “큰 눈으로 나를 너무 슬프게 원망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은 ‘안네, 왜 나를 버렸니. 도와줘, 제발 도와줘. 이 지옥에서 나를 구해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썼다. 다음 달 또 꿈을 꾸고는 12월 29일 “사랑하는 하나님, 그녀(하넬리)를 지켜주시고, 우리에게 돌려보내 주세요”라고 썼다.

수용소서 재회…안네 생각하며 증언

안네와 고슬라어가 다시 만난 건 45년 2월 어느 날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였다. 철조망 장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둘은 오랜 친구의 목소리를 알아차렸다. 둘은 울면서 어떻게 지냈는지를 이야기했고,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한 안네는 언니 마르고마저 잃을 위기에 처하자 고슬라어에게 ”나는 살 이유가 없다“고 토로했다. 고슬라어는 “안네는 그전의 활기찬 모습이 아니었다”며 “나도 마찬가지였고 우리는 망가진 소녀들이었다”고 말했다.

고슬라어는 목숨을 걸고 지정 구역을 빠져나와 안네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벽으로 돌아와 안네에게 빵 껍질 같은 먹을거리나 양말이나 장갑 등 따뜻하게 할 수 있는 물건은 뭐든지 장벽 위로 던졌다. 이후 안네는 수용소 안 다른 구역으로 옮겨졌고, 둘은 다시는 서로를 만나지 못했다. 고슬라어는 “내가 살아남았고, 안네가 살아남지 못했다는 사실은 잔인한 사고였을 뿐”이라고 했다.

안네의 일기에 등장하는 안네 프랑크의 단짝 친구 하나 고슬라어. 유튜브 캡처

안네의 일기에 등장하는 안네 프랑크의 단짝 친구 하나 고슬라어. 유튜브 캡처

고슬라어 역시 다른 가족을 잃고 여동생과 단둘이 살아남았다. 가족을 모두 잃은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집으로 돌아와 고슬라어 자매를 친아빠처럼 돌보면서 스위스 친척 집에 갈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이스라엘에 정착한 고슬라어는 간호사가 돼 자녀 셋을 두고 손주만 11명, 증손주만 30명이 넘는 대가족을 꾸렸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두고 “(유대인을 말살하려고 했던) 히틀러에 대한 대답”이라고 말했다.

고슬라어는 프랑크가 80년 91세로 사망할 때까지 연락을 지속했다. 안네가 은신 생활을 하면서 그를 항상 생각하며 꿈에서 만났던 것처럼, 고슬라어도 안네의 삶을 증언할 때마다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안네의 일기는 은신처가 발각된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끊겼어요. (내 증언이 그 후에) 끔찍하지만, 내 친구가 겪은 일로 (일기의 빈 곳을) 채우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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