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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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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은경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

이은경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

근래 우리나라는 중요한 정치적, 정책적 결정을 사법부의 판단에 맡기는 현상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정치권의 진영 다툼이 극심하다 보니 툭하면 정치적 이슈를 법원에 밀어 넣는다. 여기엔 의회의 다수 권력이 단지 머릿수에 의한 결정으로 물건 찍듯이 법을 만들어낸 것도 한몫했다. 실질적 토론을 배제한 입법은 민주적 정당성을 갖출 수 없단 비판이 거셌고, 결국 입법적 의제의 최종결정권이 헌법재판소로 넘겨졌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를 두 차례 심판한 건 지금도 충격적 전례로 남아 있다. 이렇듯 정치 대신 사법으로 국가의 갈등을 해소하려는 현상이 ‘정치의 사법화’다.

정치를 헌법 정신에 구속하려는 처음 의도는 좋았다. 그러나, 수십 년 전 과거사를 정치적, 제도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몽땅 법원에 떠넘겼다. 행정수도 이전, 이라크 파병, 통진당 해산, 간통죄, 낙태죄 등 국가의 통합을 우려할만한 굵직한 이슈들이 줄줄이 헌법재판을 받았다. 사법 의존증이 정치문화로 자리 잡는 지경이니 입법·행정·사법 삼권 분립의 취지마저 흐릿해질 판이다.

정치 대신 사법이 국가대사 결정
법과 소송의 폭발이 코앞에 닥쳐
법원과 검찰의 정치화는 큰 문제
정치복원과 사법자제에 해답있어

바야흐로 법과 소송의 폭발이 코앞에 온 시대다. 오늘날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고, 국민의 삶에 대한 법의 개입도 지나칠 정도로 많다. 사회의 복잡, 다양, 전문성이 국민의 공유 신념은 축소해 버리고, 법의 상황 의존은 확대하고 있다. 당연히 소송도 급증할 수밖에 없다. 특히 정책적 성격의 입법 증가는 사법이 분쟁 해결에 머무르지 않고, 정책 입안까지 책임지게 만든다. 시민사회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도구로 법원을 선호한다. 조직과 비용이 만만치 않은 입법운동보다 소송을 통한 사회변동 전략이 더 편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적은 노력과 비용으로 권리구제를 도모할 수 있고, 전향적 판결이 사회의 물줄기를 바꿀 수도 있다.

정치인들은 정책 결정의 오류로 인한 정치 리스크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법원 문을 두드린다. 합의의 실패로 인한 교착상태의 해결을 떠맡기고 동성애, 안락사 등 뜨거운 감자의 처리를 요구한다. 권력투쟁의 도구로 법원과 검찰을 이용하는 건 이제 일상이다. 다만, 정치권이 사법부를 존중하는 태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정치적 책임을 전가하고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폄훼하는 행태를 종종 보인다. 바라는 결과를 내놓지 않으면 거센 비판과 온갖 야유를 퍼붓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원래 선악을 판단하는 건 엄청난 권력이다. 국민은 법대 앞에 선 순간,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여탈권이 법관에게 있음을 깨닫는다.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국가의 정책 입안까지 얹어놓는 건 권력의 중심이 입법부, 행정부로부터 사법부로 대폭 이동한다는 뜻이다. 국가의 의사결정을 법률전문가 집단이 주도하는 사법통치체제(Juristocracy)의 예고편이 정치의 사법화다. 적절한 브레이크 없이 사법 기능만 강화하고 법관 재량만 확대하는 건 시민의 자율성을 훼손하고 민주적 의사 형성을 봉쇄하는 지름길이다.

현실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사법의 정치화’다. 국민감정을 빌미로 특정 세력의 편을 들고, 법리를 냉철하게 적용하지 않은 타협적 판결이 적지 않았다. 판사의 주관적 신념을 강요한 편향적 판결이 꽤 있었고, 가치 대립이 극명한 쟁점도 결론이 다소 성급했다. 정치적 합목적성을 외면한 사법 판단이 국민 갈등을 증폭하기도 했고, 극소수 엘리트의 오만한 사법 독재, 케이스 하나로 세상을 바꾸려는 권력욕의 작동도 우려할 만했다.

이제 입법과 행정의 정책적 판단에 사법이 과도하게 개입하는 문제에 대한 대책을 논의해야 한다. 해답은 ‘정치복원’과 ‘사법 자제’에 있다. 일단 정치복원이 먼저다. 정치권은 국가의 중요한 정책적, 정치적 사안을 민주적 방법으로 결정하는 토론과 대화, 설득과 타협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걸핏하면 위헌시비를 일으키는 졸속입법도 당장 그만둬야 한다. 또한, 정책 개입의 한계를 설정하는 사법 자제를 고민할 시점도 도래했다. 법관의 자질과 재판의 준칙을 제고하는 게 첫걸음이고, 사법의 기능적, 권한적 한계를 체계적으로 수용하는 게 다음 단계다. 사법부는 헌법이 강조한 사법 고유의 한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국민감정을 이용하는 정치권력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국민감정을 부추겼던 정치 세력은 점차 뇌리에 사라지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사법부 몫으로 남는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불과 며칠 전 이태원 참사라는 국가적 비극이 발생했다. 정치권이 힘을 한데 모아 피해 수습과 재발 방지를 위한 거국적 합의를 도출해 주길 바란다. 합의의 실패로 인한 정치의 사법화 수순을 다시 밟지 않기를 희망한다. 당파적 이해득실을 위한 여론몰이, 검찰과 법원을 이용한 사법 몰이를 할 생각은 꿈꾸지 말아야 한다. 언론을 조작해 국민을 선동하고 사법을 동원해 승리를 거머쥐려는 한국 정치를 우려하는 현실이 무척 안타깝다.

이은경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