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넥스트 K를 키워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김원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원배 경제산업디렉터

김원배 경제산업디렉터

언제부터인가 특정 산업이나 분야 앞에 K가 붙는 일이 많아졌다. ‘국뽕’이라고 불리는 과도한 자국 찬양일 수도 있지만 실제 몇몇 분야는 성과를 내고 있다. K가 붙으려면 한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세계 시장에서도 성공해야 한다. 얼마 전 읽었던 책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미국산 ( )의 명맥은 사실상 끊겼고…. 이 틈을 파고든 것이 바로 K( ).”

빈칸에 들어갈 단어는 무엇일까. 지난달 말 한국과 폴란드 정부, 한국수력원자력, 폴란드전력공사, 폴란드 민간 발전사 제팍이 원전 개발 계획 수립과 관련한 양해각서(MOU)와 협력의향서(LOI)를 체결했다. 폴란드가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원전 사업은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가져갔지만, 민간 중심 프로젝트는 한국의 몫이 될 수 있다. 폴란드 입장에선 투트랙 접근을 하는 셈이다.

세계 시장에 통하는 원전·방산·음악
미국·유럽이 못하는 빈자리 차지
경쟁국 견제 넘고 새 먹거리 찾아야

지난달 19일 경남 창원의 한화디펜스에서 폴란드로 갈 K9 자주포 출고식이 열렸다. 송봉근 기자

지난달 19일 경남 창원의 한화디펜스에서 폴란드로 갈 K9 자주포 출고식이 열렸다. 송봉근 기자

다만 최종 성사까지는 이런저런 난관이 있을 것이다. 한국 원전은 미국 컴버스천 엔지니어링(CE)의 기술을 토대로 개발된 것인데, 웨스팅하우스가 이 회사를 2000년에 인수했다. 웨스팅하우스는 이를 근거로 허락 없이 수출할 수 없다며 한수원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한수원 측은 큰 장애가 되지는 않을 것이란 입장이다.

웨스팅하우스는 한동안 원전을 직접 지은 적이 없어 시공 능력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지난 5월 웨스팅하우스는 현대건설과 세계 원전 시장 진출을 위한 전략적 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한국은 미국보다 훨씬 싸게 원전을 건설할 능력이 있다. 윤석열 정부와 그 이후 정부가 원전을 전략 사업으로 보고 일관성 있는 지원책을 추진한다면 충분히 결실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다음은 방산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불행한 일이지만 무기 수요는 폭증했다. 나토(NATO) 회원국인 폴란드가 우크라이나에 기존 무기를 지원하는 대신 한국산 무기를 대거 사들이기로 했다.

지난달 19일 경남 창원에선 한화디펜스와 현대로템이 각각 폴란드로 보낼 K9 자주포와 K2 전차를 출고하는 행사를 열었다. 7월 기본계약, 8월 이행계약을 맺었는데 2개월 만에 출고식을 했다.

당장 신형 전차와 자주포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가 서방 세계에선 한국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며, 폴란드가 한국을 선택한 이유다. 한국산 무기 역시 가격 대비 성능이 우수하다고 평가를 받는다.

한창 주가를 올리는 K팝의 성공 요인도 유사하다. 위에서 언급한 책은 음악평론가 김영대가 지난해 쓴 『지금 여기의 아이돌-아티스트』의 한 대목이다. “미국산 보이밴드의 명맥은 사실상 끊겼고…이 틈을 파고든 것이 바로 K팝의 아이돌 산업이다.”

‘뉴 키즈 온 더 블록’ 같은 그룹이 미국에선 더는 나오지 않으니 K팝 그룹이 그 자리를 채웠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일본 대중 음악계가 저작권에 집착한 반면, 한국 연예기획사들은 유튜브에 무료 영상을 올리며 세계를 공략했다.

미국의 대중음악상인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가 올해엔 아예 K팝을 시상 분야에 넣었다. 그만큼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책의 다른 대목을 곱씹어 보자.

“본질적으로 K팝이 영미권 팝 산업의 근본 자체를 뒤흔드는 것이 아니지만, 이제 각종 시상식이나 차트에서 그들이 팝스타를 능가하는 상업적 파괴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경계의 대상이 될 소지도 다분하다.”

웨스팅하우스가 경쟁자인 한수원을 상대로 소송을 낸다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한국은 이미 몇몇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업을 배출했다. 새로 각광을 받는 방산이나 원전은 단순 제조업이 아니며 국가의 위상과 정부의 지원이 뒷받침돼야만 성공할 수 있다. 대중음악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야 한다.

물론 방산이나 원전, K팝의 성과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미국이나 일본, 유럽의 기술과 문화를 흉내 내면서 경쟁력을 쌓았고 마침내 잠재력이 폭발했다. 빈자리가 생겨도 아무나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준비된 사람의 몫이다.

다만 따라가기형 축적으론 더는 히트 상품을 만들기 어렵다는 게 고민이다. 이젠 ‘넥스트 K’를 키워야 한다. 창의력을 가진 인재를 키우는 교육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작동해야 하고, 기업이 과도한 규제에서 벗어나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구조 개혁이 절실하지만 한국의 진영 대립과 정치 시스템이 발목을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