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게 길을 걷다가 압사한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전 국민이 침울하고, 해외에서도 애도의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다. 이 비극에 대한 분석도 꼬리를 물고 있다. ‘총체적 안전불감증’과 ‘관계 당국의 예방관리 부족’은 기본이고, 과학적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한꺼번에 인파가 몰리면서 나타나는 ‘군중 눈사태’, 밀집된 군중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난기류 현상’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여러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사고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그 핵심은 ‘방치된 위험’이 아닐까 싶다. 우선 해밀톤호텔이 원인을 제공한 불법 건축물을 가벼이 넘겨선 안 될 것 같다. 해밀톤호텔은 도로 폭 4m 규정을 어기고 건축한계선을 0.8m 잠식하면서 가뜩이나 좁은 골목을 3.2m로 좁혔다. 10여 년 전부터 불법 철제 가벽을 설치했는데 용산구청은 한 번도 단속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불법 건축물은 난기류 현상을 설명하는 결정적 근거가 될 수 있다. 혼잡한 톨게이트나 공연장 출입문에서 흔히 경험하는 병목현상의 극단적인 경우다. 해밀톤호텔의 불법 건축물은 방치된 위험이었다.
방치된 위험, 사후 대처에도 구멍
참사 거듭돼도 정쟁에 몰두한 탓
안전 시스템 구축해 재발 막아야
용산구는 “사고 이후 무허가 건축물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주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행정기관이 몰랐다고 해서 책임이 없어질까. 위험을 방치한 책임은 적지 않다. 사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도심은 물론 주택가조차 이상하다 싶은 건축물이 적지 않다. 심지어 친환경 재료를 사용하면 용적률을 높여 주는 제도까지 도입되면서 주거지에서도 일조권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존중을 무시한 행정이 결국 안전을 위협하고 사고로 이어진다. 국민의 안녕과 행복이라는 핵심 가치가 방치된 결과다.
인파 사고에 대한 당국의 안전의식 부재도 아쉽다. 1993년 새해 전야제 축제에 인파가 몰린 홍콩 란콰이펑에서 21명이 희생된 압사사고를 행정안전부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몰랐다면 부처 명칭의 ‘안전’이 무색해진다. 국민의 세금으로 공무원과 정치인의 외유성 연수가 꼬리를 물지만, 도대체 무엇을 배우고 왔다는 건가. 홍콩에선 압사사고 이후 군중이 몰리면 경찰이 출입 인원을 통제해 사람을 보호한다. 1994년 4월 영국에서도 힐즈버러 경기장에서 94명이 압사했다. 위험은 언제 어디서든 도사리고 있다.
이태원 상인회의 안전관리 미흡과 지하철이 무정차 통과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도 책임 공방이 오가고 있다. 어느 하나만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리적으로 병목현상을 일으킨 위험이 방치되고, 관계 당국의 안전 예방조치 미흡이 얽히고설킨 사고다. 그 최종 책임은 국가의 몫이다. 주최자가 없으면 국가는 더욱 안전에 힘써야 했다.
참사 4시간 전부터 “압사한다”고 신고가 쏟아졌지만 국민은 보호받지 못했다. 그 흔한 폴리스라인을 친다거나 일방통행으로 전환한다든지 임기응변적 대응도 미온적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대응 매뉴얼이라든지 근본적 시스템이 부실하다 보니 기동 대응도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군 복무 단축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의무경찰을 폐지한 것도 대응 능력을 저하했다. 부실 대응한 근무자를 문책한다고 해결될 문제일까 싶다.
대형 참사가 계속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컨대 4류 정치와 3류 행정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사고가 발생하면 안전시스템 구축보다는 정쟁만 일삼다 보니 행정은 무사안일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다. 세월호에서 평형수를 덜고 과적한 것이 사고의 근본 원인이었듯 이태원에서도 불법 건축물이 병목현상을 만들어도 방치됐다. 배가 침몰하는데도 “가만히 있으라”고 했고, “압사한다”고 절박하게 호소해도 방치됐다.
정치권이 이 문제로 정쟁을 벌이면 안전한 사회는 오지 않는다. 생때같은 아들딸의 희생 앞에서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사회의 전반적 시스템이 바뀔 때 비로소 안전사회가 구축될 수 있다. 방치된 위험에서 청년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고 비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