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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 읽기

고맙거나 미안하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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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이제 제주도 한라산의 단풍은 절정이다. 그 아래 기슭에 자리 잡은 내 집 마당 나무들의 잎사귀도 물들었다. 때때로 바람이 와서 잎사귀는 지고 다시 바람에 뒹군다. 어제는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잠깐 펼쳐 읽었다. “들판 위의 강에는/ 물 빠진 자국이 들쑥날쑥 나 있고/ 잎 떨어진 숲에는/ 나무가 넘어져 뿌리에 서리가 덮여 있네.”  머잖아 나도 이 시의 표현처럼 물 빠진 데와 서리를 보게 될 것이다. 그제는 붉게 익은 감을 땄고 몇 개는 까치밥으로 남겨 두었다. 감을 따 거둬들이면서 크고 작은 대소쿠리 두어 개를 사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국화는 아직 다 시들지 않았고, 얻어서 심은 오죽(烏竹)의 죽은 가지를 잘라내니 댓잎이 더 푸르러졌다. 댓잎에 싸락눈이 얹힐 풍경을 잠시 그려보았다. 대파와 쪽파 모종을 사서 텃밭에 심어놓았는데 그 뿌리들이 꽤 자리를 잡았고, 봄동의 잎도 어느새 크고 넓어졌다.

얼마 전 한 시인을 만났더니 이런 얘기를 했다. “요즘은 고맙거나 미안한 일 생각이 더러 나요.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는 마음은 그리운 것이 있다는 거잖아요. 그리운 것이 있는 사람은 마음을 모질게 쓰지 않아요.” 그 얘기를 듣고 하루를 보내고 이틀을 보내고 사흘을 보내면서 내게 고마운 일은 무엇이었고, 또 미안한 일은 무엇이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면서 밥을 먹다 식구들에게 이 두 가지의 일에 대해 물어보았다.

울며 온 사람과 함께 울지 못해
미안하고 그게 마음 아팠다
남의 일, 내것으로 여기며 살자

아내는 미안한 일에 대해 먼저 말을 했다. “이사 와서 저 동백나무를 두 번 옮겨 심었잖아요. 한 번 옮겨 심고 그냥 둘 걸 그랬어요. 우리가 볼 풍경을 위해 한 번 더 옮겨 심은 일이 미안해요.” 그러고 보니 작년에 마당 구석에서 자라던 동백나무를 두 차례나 옮겨 심었다. 동백나무는 몸살을 앓는 것 같았고, 올해는 동백꽃을 볼 수 없었다.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 애타게 지켜보고만 있다. 아내는 고마운 일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강아지를 데려와줘서 고마워요. 내게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주었잖아요. 내게 강아지를 데려와 키울까를 묻는 듯하더니 금방 밭담을 넘어 강아지를 데리고 오는 당신 모습이 보였어요. 굼뜬 사람이 그날만큼은 얼마나 빨랐는지 몰라요.” 거의 돌보지 않아 깡마른 강아지를 집으로 데려와 키우기로 한 날의 일을 아내는 떠올려 말했다.

둘째 아이는 “하루하루가 고맙죠. 다 고마워요”라고 말했고, 나는 “스님, 신부님처럼 말하는구나”라며 농담을 했다. 아이가 말을 이어갔다. “옷 사줘서 고맙고, 엄마가 돈 쓰는 게 넉넉해져서 고마워요. 먹는 거 입는 거 다 순조로워졌어요.” 아이의 말을 듣고 나는 잔잔하게 웃었다.

아내와 아이의 대답은 들었지만, 나는 좀체 나의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최근에 있었던 고마운 일을 생각해보았다. 그랬더니 예초기 생각이 났다. 예초기가 멈춰서 그것을 메고 이웃집에 갔더니 이웃집 아저씨가 한참을 들여다보고 만져보았다. 장갑을 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쳐 닦으며 아저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예초기를 메고 다시 철물점으로 갔다. 철물점 주인이 예초기를 뜯어보고, 기름칠을 해 시동을 걸어보았으나 고칠 수 없겠다며 부산공구로 가져가 보라고 친절하게 그곳 위치를 알려주었다. 철물점 주인도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예초기가 고장이 나서 난감해하는 내게 그 두 분은 자신의 일로 여겨 손을 걷고 도와주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가까운 일상에서 고마웠던 일을 찾고 나니 미안한 일도 떠올랐다. 마음을 좀 후하게 쓸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씀씀이든 뭐든 웃돈을 얹어주듯이 더 너그럽게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도움을 받으러 오는 사람에게 더 자상하게 더 따뜻하게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도 좀체 여유가 없었다고, 나도 사는 게 너무 팍팍했다고 애써 변명을 할 수는 있겠지만. 슬픔과 고통의 몸과 마음으로 내게 찾아온 사람에게도 충분히 관대하지 못했다. 울면서 내게 온 사람이 내게 그만 울라고 말할 때까지 함께 울지 못했다. 그게 미안했고, 그게 마음 아팠다.

허수경 시인의 시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한 사람이 한 사랑을 스칠 때/ 한 사랑이 또, 한 사람을 흔들고 갈 때/ 터진 곳 꿰맨 자리가 아무리 순해도 속으로/ 상처는 해마다 겉잎과 속잎을 번갈아내며/ 울울한 나무 그늘이 될 만큼/ 깊이 아팠는데요” 다른 사람의 일을 내 일로, 다른 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내 것으로 여기며 함께 살아갈 일이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