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 관음상 앞 공양물…쌀 봉지에 쓰인 슬픈 한마디

  • 카드 발행 일시2022.11.02

길상사는 서울 성북동에 있다. 성(城)의 북(北)쪽에 있는 동네다. 성은 한양도성을 말한다. 서울 미래유산이 된 길상사는 본래 대원각이라는 최고급 요정이었다. 1995년 소유주 김영한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며 화제가 됐다. 세간에 널리 퍼진 얘기는 이렇다.

일제강점기이던 1930년대 시인 백석은 기생 김영한과 사랑에 빠졌다. 그가 붙여준 이름이 자야(子夜)다. 백석은 김소월, 이중섭, 황순원을 낳은 평북 정주 오산학교 출신이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의 뜻으로 백석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한다. 둘은 다시 만나 짧은 동거를 한다. 백석은 함께 만주로 가자고 하지만 자야는 서울로 향한다. 이때 남긴 시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고 둘은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됐다. 김영한은 한국전쟁기에 임시수도 부산에서 정치 거물들이 드나드는 요정을 운영한다. 그 뒤 성북동에서 청암장이라는 요정을 연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대원각’으로 이름을 바꿨다. 대원각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북한산 아래 3대 요정으로 불렸다.

요정은 일제강점기 이래 정치의 은밀한 무대였다. 1947년에 서울에만 3000여 개가 넘었단다. 지금도 노년층이 즐겨 듣는 한복남의 노래 ‘빈대떡 신사’는 ‘양복 입은 신사가 요릿집 문 앞에서 매를 맞는데~’로 시작한다. 여기 나오는 요릿집이 요정이다. 한국이 세계 무대에 본격 등장하기 전인 1970~80년대, 요정은 ‘기생관광’을 온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장소이기도 했다.

1973년 국제관광공사(한국관광공사의 전신)는 요정과를 설치해 이를 관리했다. 통금이 있던 시절이었지만 접객원 증명서를 가지고 있으면 무사통과였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에 요정이 800개가 넘었다.

마당에서 본 극락전. 2014년에 스케치한 그림을 묵혔다가 완성했다. 작업을 하다가 막히면 그냥 놔두는 편이 났다. 시간이 흐르면 복잡한 마음이 정리되고 느낌이 달라진다.

마당에서 본 극락전. 2014년에 스케치한 그림을 묵혔다가 완성했다. 작업을 하다가 막히면 그냥 놔두는 편이 났다. 시간이 흐르면 복잡한 마음이 정리되고 느낌이 달라진다.

대원각은 고관들과 재벌들의 단골 회동 장소 중 하나였다. 김영한은 요정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백석을 잊지 못했다. 그러던 중 법정의 『무소유』 정신에 감화돼 1000억원 상당의 대원각 부지 2만3000여㎡와 40여 채 건물을 시주했다. 법정은 한동안 사양했으나 결국 받아들였다. 길상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등록했다. 창건 법회에서 김영한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1999년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 돈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했단다. 김영한의 유골은 길상사에 뿌려졌다. 2010년 법정 스님도 여기서 입적했다.

여기까지는 애틋한 이야기다. 하지만 생전 김영한을 깊이 인터뷰하거나, 백석을 연구한 전문가들은 의문을 표시한다. 김영한의 주장에는 사실이 아니거나 윤색이 많다는 얘기다.

요정은 리모델링을 통해 사찰로 탈바꿈했다. 본채는 극락전이 됐고 계곡을 따라 늘어선 별채들은 참선 공간이 됐다.
(길상사는 법정이 출가한 전남 송광사의 옛 이름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절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30여 곳이 넘는다. 내비게이션 잘못 찍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The JoongAng Plus 전용 콘텐트입니다.

중앙 플러스 처음이라면, 첫 달 무료!

인사이트를 원한다면 지금 시작해 보세요

지금 무료 체험 시작하기

보유하신 이용권이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