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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CPR' 의사 절망한 그때…"홍대서 더 마실까" 이말에 소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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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달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 일대에서 시민들이 의식잃은 환자들을 심폐소생술(CPR)하며 구조활동을 펼치고 있다. 뉴스1

지난달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 일대에서 시민들이 의식잃은 환자들을 심폐소생술(CPR)하며 구조활동을 펼치고 있다. 뉴스1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지인을 만나던 중 이태원에 뭔가 일이 났고, 심폐소생술(CPR)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들렸다. 밤 11시,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무작정 이태원으로 향해 걸었다. 도착시각은 11시 37분, 그때부터 두 세시간 정신없이 CPR을 했다. 이태원참사가 발생한 지난 29일 밤, 국립암센터 가정의학과 K모(여) 교수에게 벌어졌던 일이다. 그녀는 탈진했고, 30분가량 길가에 쪼그려 앉아있다가 오전 4시가 지나서쯤 집에 들어갔다.

국립암센터 한 의사의 이태원 참사 구조기록

K 교수는 이태원 얘기를 들었을 때 'CPR을 할 줄 아니까 도움이 되겠지'라는 생각이었다. 도착했을 때는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그렇게 큰일이 벌어진 줄 몰랐다고 한다. "CPR을 할 줄 안다"고 하니 경찰이 들여보내 줬다. 사고가 난 골목에서 빼낸 환자가 이태원 지하철역 큰 길가 곳곳에 누워있었다. 상당수는 호흡곤란으로 인해 얼굴·입술 등이 푸르스름했다. 청색증이었다.

시민들이 누운 환자를 열심히 CPR 하고 있었다. 응급구조사가 맥박이 없는 환자의 배 위에 N이라는 글자를 써놓은 게 보였다. K 교수도 바로 시작했다. 분당 100~120회 심장을 압박했다. 골든타임이 4분이니 잠시라도 멈출 수가 없었다. 경찰이 뒤엉킨 환자를 분리해 계속 대로변으로 데려왔다.

자정이 넘어가니 재난의료지원팀(DMAT)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와서 환자 상태에 따라 분류했다. K 교수는 CPR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서는 환자 4~5명의 가슴을 압박했다. 이후 환자를 응급구조사에게 넘겼다. 앰뷸런스 안에서도 심폐소생술이 계속됐을 것이다.

환자 한 명은 CPR을 중단해야 했다. 내부 장기에 손상을 입었는지 복부 팽창 증세가 있었고 입·코로 피가 나왔다. 이런 환자는 의료기기로 기도를 확보해야 하는데, 그런 장비가 부족했다. 소생 가능성이 있는 환자는 기도를 확보하고 입안의 피를 제거했다. 소생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판단되면 다른 환자로 옮겼다.

K 교수가 처음 현장에 갔을 때는 심폐소생술 인력이 환자당 1명이 채 안 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CPR 가능한 시민이 늘었고 환자당 3~4명이 됐다. 그러면서 번갈아 가면서 CPR을 했다(이를 손 바꿈이라고 표현한다). K 교수도 시민이 CPR 하던 환자 3~4명의 손 바꿈을 했다. CPR을 많이 해보지 않은 시민 옆에서 가슴 압박 속도를 코치했다. K 교수는 "일각에서 여자 환자를 덜 구조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고 잘라 말했다.

CPR 참여자 중 여성도 적지 않았다. 손 바꿈 하면서 물어보니 간호사라고 했다. 간호사들이 K 교수를 많이 도와줬다고 한다. 20대로 보이는 한 여성이 CPR에 열중인 K 교수에게 다가왔다. 휴대폰으로 친구의 사진을 보여주며 "혹시 본 적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친구와 같이 왔는데, 나는 벽에 붙어서 괜찮았다. 친구의 손을 놓쳤는데…"라며 울먹였다.

K 교수는 몇 시까지 CPR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시간이 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너무 피해자가 많아서 쉴 틈이 없었다. 내 환자가 끝나면 혼자서 가슴을 압박하는 사람에게 달려갔다. K 교수와 시민들이 한마음으로 움직였다.

K 교수는 지난달 30일 새벽 3시 정도에 CPR이 끝났을 것으로 짐작한다. 환자 이송이 거의 끝나고 CPR 할 환자가 없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K 교수는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탈진 상태였다. 30분 넘게 쪼그려 앉아 있었다. 한남동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오늘 도대체 내가 뭘 본 거지.'
정신을 차려보려고 해도 어떤 상황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날 심폐소생술을 한 시민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사람 찾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족이나 친구를 찾는, 애타는 모습이었다. 경찰의 수색도 이어졌다.

K 교수는 "그날 CPR을 한 환자 중 맥박이 돌아온 사람이 없다. 그래도 살아났을 거라고 믿고 싶다"고 했다. 이어 "아무리 CPR을 해도 맥박이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서 무능한 의사가 된 듯했다"고 자책했다. 그녀는 "무조건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동생처럼 보이는 앳된 얼굴, 코피가 묻은 얼굴이 눈에 선하다. 지금 죽기엔 너무 어린데…"라고 말했다.

탈진 상태가 될 때까지 온 힘을 다했던 K 교수에겐 또 다른 악몽도 생생하게 남았다. 잠시 물을 마시는데, 20대들이 "홍대 가서 마저 마실까"라고 말하는 게 들렸다. K 교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몸서리가 쳐졌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다음 술자리를 찾더라.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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