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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서도 외롭지 마라"…초등생 때부터 단짝친구 나란히 빈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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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태원 참사’ 합동분향소가 31일 서울광장·녹사평역 등에 마련됐다. 헌화하는 시민. [연합뉴스]

‘이태원 참사’ 합동분향소가 31일 서울광장·녹사평역 등에 마련됐다. 헌화하는 시민. [연합뉴스]

“시험 잘 쳐서 장학금 탈 수 있을 것 같아. 걱정 마요. 다음 주엔 부산 갈게요.”

이태원 참사로 안타깝게 숨진 노모(27·여)씨가 부산에 사는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다. 간호사가 되기 위해 올해 늦깎이로 대학에 입학한 노씨의 꿈은 생각지 못한 비극에 꺾였다.

31일 오전 노씨 빈소가 차려진 부산의 한 병원. 이곳에서 만난 유족들에 따르면 성격이 밝고 살뜰한 성격인 노씨는 고교 졸업 뒤 부산시 한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간호사가 되기 위해 올해 전남 목포 간호보건대학에 입학했다. 노씨 유족은 “병원에서는 계속 일해 주길 바랐지만, 공부하겠다는 아이 의지가 확고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노씨는 어딜 가든 곧잘 가족에게 알리고 잠결에도 엄마가 연락하면 즉각 반응했다. 지난달 30일 새벽 이태원 참사 소식을 접한 가족은 불안해졌다. 시험을 마친 노씨가 친구와 함께 서울에 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초조한 마음에 딸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딸 어디야. 혹시 이태원은 아니지?”

겨우 연결된 딸의 휴대폰, 받은건 경찰관

눈물을 흘리는 추모객. [뉴스1]

눈물을 흘리는 추모객. [뉴스1]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도 응답이 없었다. 어머니 등 가족은 계속해서 노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내 통화가 연결됐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린 건 용산경찰서 경찰관 목소리였다. 노씨와 함께 이태원에 갔던 친구 박모(27·여)씨도 이번 참사에 희생됐다. 노씨 유족은 “떠난 곳에서도 두 아이가 정겹게 지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국의 장례식장에 뿔뿔이 흩어졌던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신원과 관계가 확인되면서 함께 세상을 등진 가족·친구·동료·연인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서울광장 분향소에서 헌화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 [뉴스1]

서울광장 분향소에서 헌화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 [뉴스1]

지난 2월 은행원으로 입사해 정규직 전환을 위한 공부를 해오던 오모(23·여)씨도 필기시험 합격을 기념하기 위해 친구 김모(23·여)씨와 이태원으로 향했다가 함께 생을 마감했다. 31일 오전 오씨와 김씨의 빈소가 차려진 광주시 광산구 한 장례식장. 이곳에서 만난 유족들은 초등학교부터 단짝이었던 딸들이 외롭지 않게 같은 곳에 빈소를 마련했다고 했다. 사고를 당하기 전 딸들이 보낸 사진을 보던 유족들은 “갈 때도 같이 갔으니 하늘나라에서도 외롭지 않게 함께 보내주자”고 말했다.

단짝인 이들은 광주에서 공부를 마치고 상경해 오씨는 은행, 김씨는 백화점에 취업해 서울살이를 하고 있었다. 최근 오씨는 정규직 필기시험에 합격했고, 김씨는 직장에서 승진했다. 겹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이태원 핼러윈 행사장을 찾았지만 영원히 돌아올 수 없게 됐다.

3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 체육관에 마련된 이태원 사고 관련 유실물센터. 이날 밤부터 11월 6일까지 운영된다. [뉴시스]

3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 체육관에 마련된 이태원 사고 관련 유실물센터. 이날 밤부터 11월 6일까지 운영된다. [뉴시스]

경기도 평택시에 사는 김모(25·취업준비생)씨도 지난달 29일 밤 친구 4명과 이태원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친구 2명도 함께 사망했고 1명만 살아남았다. 전북 익산에 사는 김씨의 아버지는 아들과의 마지막 통화를 떠올리며 표정이 굳었다. “사고가 난 지난 토요일 오후 8시쯤 아들과 통화를 했는데 이태원이라고 하더라. 사람이 많아서 밥 먹기가 힘들다고 하던데….”  그러면서 김씨의 아버지는 “이태원 사고 속보에 놀라 자정이 넘어서까지 아들에게 전화했는데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씨 유족은 기아자동차 협력업체 직원이던 아들이 평택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최근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회사를 알아보던 중이란 사실을 사고 후에야 알게 됐다고 한다. 김씨의 부모는 “아들이 최근 부모도 모르게 아르바이트를 뛰면서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고 있었다는 것을 아들의 유품인 핸드폰 내용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알게 됐다”며 끝내 눈물을 흘렸다.

추모 공간을 찾은 외국인. [연합뉴스]

추모 공간을 찾은 외국인. [연합뉴스]

20대 여성 친구 4명이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한꺼번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31일 오전 11시 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동 경기도의료원 의정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박모(29·여)씨의 빈소는 무거운 침묵이 가득했다. 박씨의 아버지는 한쪽에 몸져누워 있고, 다른 편에 앉은 어머니는 연신 흐느껴 울고 있었다.

추모 공간을 찾은 외국인. [연합뉴스]

추모 공간을 찾은 외국인. [연합뉴스]

박씨 유족에 따르면 박씨 등 사회 친구 5명이 함께 이태원으로 나갔고 먼저 귀가한 1명만 화를 면했다. 박씨의 외삼촌은 “숨진 조카는 대학 졸업 후 일본으로 2년간 유학을 다녀온 후 학원에서 일본어를 강의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추석에도 전남 여수 외가를 찾아 외할머니와 사흘간 머물다 갔을 정도로 마음이 따뜻하고 밝은 아이였다”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밤 홀로 귀가한 친구에게서 “친구들과 함께 그날 밤 이태원에 갔다”는 말을 듣고는 충격에 빠진 가족들은 시내 병원과 장례식장을 샅샅이 뒤지고 실종자 접수까지 했지만 이튿날이 돼서야 박씨가 수원 성빈센트병원에 안치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중고생 6명 등 10대 희생자 12명

분향소를 찾은 로이드 브라운 주한미군 용산기지사령관. [뉴스1]

분향소를 찾은 로이드 브라운 주한미군 용산기지사령관. [뉴스1]

모녀 등 일가족 3명이 함께 변을 당하기도 했다. 중학교 3년생 딸과 어머니 B씨(46), 그리고 큰이모 C씨(53) 등 3명은 다른 가족 3명과 함께 이태원으로 놀러 갔다가 유명을 달리했다. 사망한 어머니와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장 친했다는 한 네티즌은 맘카페에 “친구가 아이들 구경시켜 주겠다고 가서는 언니와 나의 친구, 중3 큰딸과 함께 돌아오지 못했다”며 “벌써 너무 보고 싶다고 목놓아 우는 친구 남편…. 아프고 아파 내일 보러 가는 길이 무섭다”는 글을 올렸다. 이어 “내 친구로 함께해서 행복했고 또 보자”며 “이곳에서 많은 위로와 명복을 기원하는 글을 보고 제 이야기 나누어 봤다”고 덧붙였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고등학교 친구 4명이 이태원에 갔다가 이들 중 2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현장에서 사망한 한 고교생의 작은할아버지(63)는 “엄마는 가지 말라고 엄청 말렸는데 친구들과 약속 때문에 간 것 같다”며 “과학 관련 자격증도 많이 따고 열심이었다. 정말 착했다”며 눈물을 보였다. 사망한 학생들이 다니던 학교 교장은 “1일에 하루 휴교하고, 교사와 학생들이 조문 올 예정”이라며 “학교 측은 숨진 학생 2명과 함께 이태원을 방문했던 다른 학생 2명을 대상으로 심리치료를 했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이태원 참사 학생 피해 현황을 집계한 결과 고등학생 5명, 중학생 1명, 교사 3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사망한 학생들은 모두 서울에 있는 중·고교에 재학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10대 희생자는 중·고교생 6명을 포함해 모두 12명으로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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