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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이재명 리스크’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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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인류가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77년간 누리고 있는 긴 평화(Long Peace)는 끝나가고 있는가. 스티븐 핑커 하버드대 교수는 8년 전 저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인류 역사에서 폭력은 감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세계는 갈수록 세계대전 사이의 불안했던 전간기(戰間期·1919~1939)를 닮아가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났던 한 세기 전 각국은 전쟁을 위해 풀었던 통화를 거둬들였다. 기업이 줄줄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거리를 메웠다. 국제 금융질서가 무너졌고 1929년 대공황이 덮쳤다. 너도나도 각자도생의 길을 선택했다. 막대한 배상금에 신음하던 패전국 독일 국민은 파시즘의 괴물 히틀러를 불러냈다.

영국 대표였던 케인스가 베르사유조약을 비판하면서 예언한 대로 결국 2차 세계대전이 현실이 됐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패권국가 미국이 흔들리면서 국제정치가 무정부 상태가 됐고, 보호무역주의와 전체주의·과잉민족주의가 춤추고 있는 지금과 흡사하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 정세가 1930년대와 닮은 점이 있어 예측할 수 없는 사태가 우려된다”고 했다.

이재명 대표 ‘피의자’ 신분이지만
경제·안보 위기 극복 위해서라면
‘당당하게 수사받겠다’ 약속하고
대통령은 야당 대표로 손잡아야

우리를 둘러싼 네 강대국과 북한은 한결같이 까다로운 상대들이다. 동맹국 미국은 우리의 가치를 저울질하면서 거리를 뒀던 전력(前歷)이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의 한국전쟁 개전(開戰)을 승인했고, 중국은 북한과 한패가 돼 우리와 싸운 적(敵)이었다.

일본은 식민지배가 끝나자 한반도 분단을 유도해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의 불씨를 마련한 원죄가 있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패색이 짙어지자 소련을 한반도에 끌어들여 전후(戰後) 중국과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파트너가 되려는 목표를 세웠고, 성공했다. 이를 위해 한반도 방어체제까지 변경했다. 중국에 주둔한 100만 명의 대병력을 만주로 이동시키지 않았다. 소련의 한반도 침공이 쉬워졌다. 일본군은 “소련군이 1리(里) 전진하면 2리 퇴각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다.

소련군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한반도에 진군했다. 미국은 소련 단독으로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서둘러 38선 분할안을 소련에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귀족원 의장과 총리를 지낸 고노에 후미마로는 “소련 참전은 신(神)이 준 선물”이라고 했고,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1차 세계대전 승자였던 일본보다 2차 세계대전 패자였던 일본이 더 낫다”고 토로했다.

일본의 ‘패전 전략’은 미국의 지정학자 니컬러스 스파이크먼 예일대 교수의 전후 구상과 맥을 같이한다. 그는 1942년 저서 『세계 정치에서 미국의 전략』에서 미·일 동맹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진주만 기습을 감행한 직후였다.(『지정학의 힘』, 김동기) 강대국은 이렇게 감정을 배제하고 냉혹한 실리적 계산으로 한국을 요리해 왔다.

푸틴은 지금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면 한·러 관계는 파탄”이라고 협박하고 있다. 시진핑이 공언한 대로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미·중의 군사적 대결은 피하기 어렵다. 주한미군이 대만 전선에 투입되면 한국은 미군의 후방기지로 간주되고, 중국의 공격 대상이 된다. 김정은은 여차하면 선제 핵공격을 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고 있지만 남북 간에는 핫라인도 없다. 마이클 멀린 전 미국 합참의장은 “(한반도는)북·미가 전쟁 직전까지 갔던 2017년보다 더 위험하다”고 했다.

이렇게 버거운 주변국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남남갈등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을 놓고 신구(新舊) 정권은 서로를 물어뜯고 있다. 월북 사실을 조작한 혐의로 문재인 정권의 국방부 장관이 구속됐다. 그러자 문 정권 안보실장·비서실장·국정원장은 “선택적 짜맞추기”라며 반격했다.

경제위기는 안보위기와 직결된다. 최악의 자금시장 경색은 전임자의 레고랜드 사업을 뒤집기 위한 김진태 강원지사의 채무불이행 결정이 촉발했다. 급한 불을 끄는 데도 야당의 협조가 필수다. 비상경제대책회의에 야당 의원도 참석해야 한다. 내부에서 싸우면 경제도, 안보도 지킬 수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제1 야당 대표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대장동’ 수사를 대비한 방탄이 절실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통령 국회 시정연설을 보이콧했다. 검사 출신인 윤 대통령은 검찰이 수사 중인 피의자를 만나는 것이 원칙에 어긋나고 부적절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윤 대통령은 2차대전 때 영국 총리 처칠이 노동당 대표 애틀리와 초당적 전시연립내각을 구성한 사실을 거론한 적이 있다. ‘제1 공복(公僕)’다운 절박한 상황인식이다. 야당의 협조는 절실한데 대통령이 야당 대표를 만날 수 없는 딜레마를 어떻게 풀 것인가.

이 대표는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당하게 검찰 수사에 응해 진실을 밝히겠다”고 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피의자’가 아닌 ‘야당 대표’ 이재명을 만나 초당적 협력을 요청해야 한다. ‘이태원 참사’ 비극도 있었다. 두 사람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지도자답게 고도의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재명 리스크’를 더이상 방치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