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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악당이 되긴 싫은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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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성지원 기자 중앙일보 기자
중앙일보 정치팀 성지원 기자

중앙일보 정치팀 성지원 기자

그때 주식을 샀더라면. 그때 주식을 팔았더라면. 그때 한 잔만 덜 먹었더라면. 무수한 선택이 만든, 지금 내 인생이 내가 살아볼 수 있는 여러 인생 중 가장 최악의 버전이라면 어떨까.

영화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그 최악의 버전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에서 빨래방을 하는 중년 여성 에블린은 세무조사, 말 안 듣는 딸, 답답한 남편으로 고통받던 중 여러 우주에 각각 다른 버전의 자신이 살고 있다는 멀티버스의 존재를 알게 된다.

결혼하지 않고 쿵후 스타가 된 에블린, 요리사 에블린, 손가락이 핫도그인 미래세계의 에블린. 그중 빨래방 에블린은 모든 선택의 순간 실패하는 길만 족족 선택한 “최악의 버전”이다. 멀티버스를 통해 다른 우주에서 살 수 있음을 알게 된 에블린은 지나온 과거를 후회하고 가보지 못한 미래를 갈망하며 갈등한다.

영화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인공 에블린이 멀티버스의 존재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장면.

영화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인공 에블린이 멀티버스의 존재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장면.

지금 우리 국회에는 확실히 이번 우주가 최악의 버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 같다. 한쪽은 과거를 되돌리자고만, 한쪽은 훌쩍 미래로 가자고만 하니 멀티버스가 따로 없다.

집권 6개월 차인 여당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이들에겐 아직도 평산마을의 전직 대통령이 모든 악재의 주원인이다. 매일같은 북한의 도발은 “전 정권의 퍼주기식 대북 정책 결과”며, 수출 악재인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통과도 “전 정부 외교 노선이 ‘친중반미’였기 때문”이다. 강원도의 헛발질보다 전 정부가 “시중 자금경색의 주요 원인 제공자”라고도 한다.

반면 야당은 시간을 4년 반 뒤로 당기고 싶어한다. 벌써부터 “정권 퇴진”하고 대선을 앞당기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돈맥경화’나 고물가보다 근거도 없는 대통령의 술자리 ‘지라시’가 “제2의 국정농단에 해당할 만큼 엄청난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6개월 차 대통령에게 “가장 현명한 건 자진 사퇴”라고까지 한다.

안타깝지만 언제나 지금이 최악이다. 한국갤럽에 따르면 최근 5개월간 ‘향후 1년간 살림살이가 나아질 것’이라고 본 비율이 20%를 넘긴 적이 없다. 전 정부 때도 코로나19 백신 보급이 시작된 2021년 전에는 십수 개월간 그랬다. 그때도 “정권교체만 되면”(국민의힘), “전 정부 적폐만 청산하면”(민주당) 살림살이가 나아진다고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자. 영화 속엔 악당 ‘조부 투바키’가 나온다. 멀티버스를 이용해 온갖 과거와 미래를 다 경험해 본 조부 투바키는 세상 모든 것이 “아이고 의미없다(Nothing‘s matter)”고 말하며, 현실에 괴로워하는 에블린을 허무주의로 데려가려 한다. 이런 악당이 되지 않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