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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지는 설악동 … 가게 사장이 기자에게 물었다 “유령 나올 것 같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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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호 14면

SPECIAL REPORT 리모델링 급한 한국 관광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숙박업소 ‘설악의아침’의 지난 16일 모습. 엄산호 설악동번영회장은 “장사가 예전만큼 안돼 방치 상태”라고 밝혔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숙박업소 ‘설악의아침’의 지난 16일 모습. 엄산호 설악동번영회장은 “장사가 예전만큼 안돼 방치 상태”라고 밝혔다. 김홍준 기자

“속초 시내요.” “속초 시내요.” 덴마크에서 온 알렉산더(33)·나탈리(29) 커플도, 주한미군 칼 리드(43) 준위도 지난 16일 설악산을 찾기 전날 묵은 곳을 말했다. 속초시내 방향의 콘도에 머무른다는 김주원(30·서울 도봉구)씨는 “설악동이요? 처음 들어봤습니다”라고 반문했다.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이름 그대로 설악산의 관문이다. 1980~90년대 이 가을의 단풍처럼 화려함을 뽐냈던 우리나라 대표 관광지구가 스러졌다. 이들처럼 그곳에 머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설악동은 낙엽처럼 차곡차곡 쌓인 악재의 무거움을 버티지 못했다. 설악동은 한국 관광의 어제를 보고 오늘을 진단하며 내일을 가늠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지난 10월 둘째 주말의 설악동은 단풍철임에도 을씨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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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C지구 개발이 진행 중인 1970년대 후반의 모습. [중앙포토]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C지구 개발이 진행 중인 1970년대 후반의 모습. [중앙포토]

박정희 대통령은 설악산에 애착이 강했다. 조우 상지대 관광학부 교수는 “1969년 8월 미국을 방문한 박 대통령은 요세미티에 큰 감명을 받고 설악산을 국립공원(1970년)으로 밀었다”고 밝혔다. 1978~79년 설악동종합개발사업이 진행됐다. A~F지구가 들어섰다. 수학여행단 등이 몰려들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40여 년이 흐른 2022년, 설악동 지구는 만성 병자처럼 쇠잔해졌다. 엄산호 설악동번영회 회장은 “숙박업소 80여 곳 중 50여 곳이, 식당·유흥업소 등 150여 곳 중 100여 곳이 휴·폐업 상태”라며 “나도 2002년 태풍 루사 때 업소가 침수됐지만 복구해봤자 장사도 안될 것 같아 20년째 그대로 두고 있다”고 밝혔다.

수학 여행 안 오고 속초 시내로 빠져

지난 10월 16일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C지구에서 가장 큰 상가는 도로변의 몇 곳만 문을 열었을 뿐, 도로 안쪽과 2층은 모두 휴·폐업 상태였다. 김홍준 기자

지난 10월 16일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C지구에서 가장 큰 상가는 도로변의 몇 곳만 문을 열었을 뿐, 도로 안쪽과 2층은 모두 휴·폐업 상태였다. 김홍준 기자

설악동은 왜 피폐해졌을까. 지난 16일 오전 5시 30분. 어스름을 뚫고 차들이 소공원(A지구)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미 만차에 가까웠다. 오전 7시쯤에는 차량이 긴 꼬리를 물고는 2㎞ 가까이 이어졌다. C지구 아리랑리조트의 조인옥(60) 사장은 “보통 단풍철엔 이 앞까지 3㎞ 정도 차가 막힌다”고 말했다.

소공원 주차장은 신흥사 소유다. 반면 무료인 B·C지구 주차장은 한산했다. 이곳에서 40년째 건어물 장사를 하는 조차순(72)씨는 “단풍철 2~3주간 반짝 장사가 될 뿐, 사람들이 다 ‘바닷가 쪽’으로 빠져나간다”며 한숨을 쉬었다. 바닷가 쪽은 속초 시내를 일컫는다. 그 옆에서 슈퍼를 운영하는 차모(70)씨는 “단풍철이라 손님이 많으면 노래방이라도 열어놓으려고 했더니, 노래 업데이트 비용 50만원을 뽑을 만큼 사람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접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길가 점포만 몇 곳 운영할 뿐, 2층과 길가 뒤편 점포 20여 곳은 모두 문을 닫았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는 새똥이 가득했다. 차씨는 “유령이 나올 것 같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지난 10월 16일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A지구의 소공원 주차장에 주차하기 위해 차들이 2km 늘어섰다. 소공원 주차장은 관광객들이 B, C지구를 패싱하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김홍준 기자

지난 10월 16일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A지구의 소공원 주차장에 주차하기 위해 차들이 2km 늘어섰다. 소공원 주차장은 관광객들이 B, C지구를 패싱하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김홍준 기자

설악동 몰락의 한 원인으로 소공원 주차장으로 인한 B·C지구 ‘패싱’이 꼽힌다. 정인철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국시모) 사무국장은 “소공원 주차장을 폐쇄하고 관광객이 B·C지구에 머무를 수 있도록 유도해야 설악동이 회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20년 가까이 맴돌고 있다. 하지만 소공원 주차장을 없앤다고 관광객이 설악동으로 몰릴지는 미지수다. 설악동의 몰락은 관광 트렌드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대규모 관광단지의 현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C지구 상가 앞에는 리무진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이 버스 중 하나에서 내린 등산객 김모(53, 경기도 고양시)씨는 “새벽 4시에 오색에 도착해 대청봉을 찍고 소공원으로 내려왔는데, 우릴 태워준 버스가 이곳에 대기하는 동안 잠깐 식당에 들렀다”고 말했다. 이런 ‘리무진 무박 산행’은 서울에서 설악산을 다녀오는 경우, 비용은 보통 3만5000원 선이다. 편하고 비용이 적게 들어 인기다. 코로나19로 한때 주춤했지만, 방역 지침이 풀리면서 예약 대기를 해야 할 정도다. 서울~양양 고속도로 등 교통망의 발달은 이런 유행을 부채질했다.

리무진 관광버스 이용 무박산행 유행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C지구는 침체 속에 설악산 소공원으로 이어지는 설악산로와 인접한 가게만 주로 문을 열었다. 그나마 새벽에 도착해 설악산 등산을 한 뒤 내려오는등산객들이 잠시 들른다. 새벽에 태우고 온 '고객'을 다시 태워 가려는 리무진 버스들이 C지구 식당 앞에 주차해 있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C지구는 침체 속에 설악산 소공원으로 이어지는 설악산로와 인접한 가게만 주로 문을 열었다. 그나마 새벽에 도착해 설악산 등산을 한 뒤 내려오는등산객들이 잠시 들른다. 새벽에 태우고 온 '고객'을 다시 태워 가려는 리무진 버스들이 C지구 식당 앞에 주차해 있다. 김홍준 기자

대규모 단체관광, 수학여행의 퇴조 역시 몰락을 부채질했다. 특히 식당보다 숙박업소가 휘청이고 있다. 이훈 한양대 국제관광대학원장은 “설악동은 경주·제주와 함께 대규모 수학여행을 위해 조성된 곳인데, 수학여행이 ‘소규모 테마형’으로 바뀌면서 타격을 받은 것”이라며 “게다가 코로나19로 수요가 급증한 소규모·개별 여행과 설악동 같은 대규모 숙박단지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설악동의 한 숙박업소 사장은 “과거 설악동에 방이 없으면 할 수 없이 속초에서 숙소를 구했는데, 이제는 속초에 방이 없으면 떠밀리듯 설악동에서 찾는다”고 말했다.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C지구는 설악산 소공원으로 이어지는 설악산로와 인접한 가게만 주로 문을 열었을뿐, 한 블럭 안으로 들어오면 문을 닫은 업소들이 즐비하다. 식당보다 숙박업소들이 타격이 커 길가에 위치한 이 숙박업소도 공사중이라는 안내문을 붙였지만 사실상 폐업이라는 게 현지 주민의 말이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C지구는 설악산 소공원으로 이어지는 설악산로와 인접한 가게만 주로 문을 열었을뿐, 한 블럭 안으로 들어오면 문을 닫은 업소들이 즐비하다. 식당보다 숙박업소들이 타격이 커 길가에 위치한 이 숙박업소도 공사중이라는 안내문을 붙였지만 사실상 폐업이라는 게 현지 주민의 말이다. 김홍준 기자

제주의 중문, 경주의 보문 관광단지는 가족과 해외 여행객을 겨냥한 고급화로 활로를 찾았다. 중문은 내국인면세점을 포함한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등이 들어서며 신혼부부와 외국인이 많이 찾는 제주의 대표적인 숙박지역 가운데 하나라는 명성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수학여행단을 위한 대형 온돌방을 갖춘 여관이 즐비하던 보문은 경주타워, 블루원 워터파크 등과 함께 가족 여행지로 인기를 되찾고 있다.

속초시도 올 3월에 2024년까지 총 264억원을 들여 B지구에 홍삼체험센터를 재정비하고 집라인, B지구 주차장과 C지구를 연결하는 799m 길이 스카이워크, 쌍천 출렁다리 등을 만드는 설악동재건사업 추진 계획을 내놓았다. 엄산호 번영회장은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생기면 설악동이 다시 주목을 받을 것”이라며 “상인들의 기대감이 크다”고 전했다. 반면 지구 사정에 따라 주민들은 “싹 밀어버려 재개발해야 한다” “현재 인프라를 갖고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냥 이대로 놔두자”는 이견을 보이기도 한다.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C지구는 설악산 소공원으로 이어지는 설악산로와 인접한 가게만 주로 문을 열었을뿐, 한 블럭 안으로 들어오면 이렇게 문을 닫은 업소들이 즐비하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C지구는 설악산 소공원으로 이어지는 설악산로와 인접한 가게만 주로 문을 열었을뿐, 한 블럭 안으로 들어오면 이렇게 문을 닫은 업소들이 즐비하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C지구에 강원은행 건물이 텅 빈채로 수년째  방치돼 있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C지구에 강원은행 건물이 텅 빈채로 수년째 방치돼 있다. 김홍준 기자

설악동 뿐만 아니다. 조우 교수는 “지리산 쌍계사·화엄사, 속리산 법주사 지구도 스러지고 있다”며 “이젠 이런 명산·명소를 직접 찾는 관광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관련자들의 상생과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단체 관광객을 겨냥한 특색없는 식당과 질 낮은 기념품 가게만 즐비한 기존 관광단지로는 깔끔한 숙소와 이름난 맛집, 세련된 카페를 찾는 젊은 여행객들의 눈높이에 맞출수 없다.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소공원의 A지구는 B, C지구보다 상가 손님이 많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소공원의 A지구는 B, C지구보다 상가 손님이 많다. 김홍준 기자

이훈 원장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국내외 여행 경험이 많아지면서 숙박에 대한 자기 취향이 확실해져 값싼 숙박보다는 비용이 들더라도 취향에 맞고 안전한 숙박을 선호하고 있다”며 “설악동을 비롯한 대규모 단체손님 위주의 관광단지는 현재와 미래 관광 추세에 맞춰 리모델링하지 않으면 한국의 관광 경쟁력에 상처를 남길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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