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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여학생 500명 창고에 가둬 빵으로 세균전 실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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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49〉

만주국 시절 하얼빈의 중심가. 주변에 백계 러시아인과 유대인이 개설한 상점과 일본백화점이 몰려있었다. [사진 김명호]

만주국 시절 하얼빈의 중심가. 주변에 백계 러시아인과 유대인이 개설한 상점과 일본백화점이 몰려있었다. [사진 김명호]

1931년 동북3성을 점령한 일본의 5족협화(五族協和) 표방은 말뿐이었다. 동북에 괴뢰정권 만주국 수립과 동시에 잔혹한 통치를 시작했다. 인간을 대상으로 세균전 실험도 서슴지 않았다. 여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0년 가을, 지린(吉林)성 푸쑹(撫松)의 여자사범학교에 일본군이 난입했다. 교실 문을 차고 들어와 수업 중인 학생들을 끌어냈다. 교사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학생들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과 충돌했다. 결과는 보나 마나, 직 싸게 얻어터지고 일어나지도 못했다. 맨땅에 주저앉아 일본군이 몰고 온 대형차들에 실려 가는 제자 500여명 바라보며 땅을 쳤다.

물집 생기고 고열, 머리 아픈 증상 번져

일본 관동군에는 러시아인이 많았다. [사진 김명호]

일본 관동군에는 러시아인이 많았다. [사진 김명호]

학부모와 교사들이 일본군 부대로 몰려갔다. 학생들의 소재를 물었다. 몽둥이세례 외에는 소득이 없었다. 이튿날 저녁 무렵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학생들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황당해하는 모습 외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끔찍한 상상을 떨치지 못하는 부모와 교사들의 걱정 어린 위로를 받은 후 있었던 일을 털어놨다. 500여명의 말이 거의 일치했다. “일본인들은 우리를 커다란 창고에 가뒀다. 먹는 건 고사하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하루를 지냈다. 여자들이다 보니 두려워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기아와 추위만 견디기 힘들었다. 오늘 아침 일본인들이 우리 있는 곳으로 왔다. 무슨 행패 부릴지 각오를 단단히 했다. 일본 군인들은 의외였다. 커다란 포댓자루에 가득한, 큼직하고 따끈따끈한 빵을 나눠주며, 더 있으니 실컷 먹으라고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뭔가 수상하다며 빵을 바닥에 던지는 여학생들에겐 총으로 위협하며 강제로 먹였다.”

모두 먹기를 마치자 군인들은 가버렸다. 몇 명이 시험 삼아 창고 문을 밀어봤다. 스르르 열리자 밖으로 나가봤다. 사람 흔적이 없었다. 황급히 돌아와 소리쳤다. “지키는 사람이 없다. 문도 잠그지 않았다. 가건 말건 맘대로 하라는 의미다.” 여학생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조혼(早婚)이 정상인 시대였다. 여학생 중에는 부모들끼리 혼인을 약정한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무사히 귀가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미래의 남편감들이 배우자가 될 여학생들 집 주변을 맴돌았다. 밤바람이 차니 들어오라는 말에 마지 못한 듯이 들어가서 묻는 말이 똑같았다. “별일 없었느냐.” 없었다고 해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반복하다 귀싸대기 맞고 쫓겨난 청년이 한둘이 아니었다.

만주국 수도 신징의 중국인 초등학교. [사진 김명호]

만주국 수도 신징의 중국인 초등학교. [사진 김명호]

여학생들은 집에서 하루 쉬고 학교로 갔다. 수업과 생활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틀 후 500여명 여학생 전원이 이상한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피부에 선홍색 물집이 생기고 체온이 상승했다. 땀이 비 오듯 하고, 눈이 충혈되고,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접촉했던 부모, 교사, 친구들도 같은 증상이었다. 급성 전염병이 푸쑹 전역으로 번졌다. 의료 시설에 한계가 있었다. 병원 문고리 잡아보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순식간에 푸쑹 전역이 인간 지옥으로 변했다. 2개월이 지나자 주변 도시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일본군이 준 빵에 세균이 들어있었다고 직감했지만 다들 쉬쉬했다. 비슷한 일이 만주에 빈번했다.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던 다롄(大連), 펑텐(奉天), 신징(新京), 하얼빈(哈爾濱) 같은 주요 도시는 달랐다. 만주국 14년간 악성 전염병이나 괴질이 발생한 적이 없는, 일본인에겐 왕도낙토(王道樂土)였다. 백화점에 일본에서도 사기 힘든 고가의 수입품들이 즐비했다. 일본인 전용 상점도 일본 대도시의 대형 상점보다 규모가 컸다. 물품이 다양하고 가격도 저렴했다. 대도시가 아닌 웬만한 도시도 일본인 거주지역은 일본과 차이가 없었다. 스시집과 일본오락장이 한 집 건너 두 집이었다. 일본인회관은 일본 중소도시보다 더 화려했다. 일본 유명 음식점 분점과 댄스홀, 영화관은 기본이었다. 출입하는 일본인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낮에는 테니스, 골프, 사냥으로 식민지 특유의 문화를 만끽했다. 겨울에는 스키와 스케이팅, 아이스하키 등 동계운동을 즐겼다. 우리의 민족교육자 범정(梵亭) 선생의 독립운동 근거지 우룽페이(五龍背)의 온천지역은 허구한 날 만주국 고관과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직원, 관동군 장교들로 북적거렸다.

“하얼빈은 바다 없는 상하이, 낭만 넘쳐”

1941년 12월 말, 다롄 일본인 여학교의 아이스쇼. [사진 김명호]

1941년 12월 말, 다롄 일본인 여학교의 아이스쇼. [사진 김명호]

만주국 시절 다롄은 일본 화족들의 피서지였다. 남산(南山) 산록(山麓)에 서구식 저택이 즐비했다. 흔히들 ‘동양의 파리’ 혹은 ‘동양의 모스크바’라고 부르던 하얼빈은 서구의 풍정(風情)이 물씬 풍기는 국제도시였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볼 수 없는 도시의 매력에 넋을 잃은 무명작가의 소설 한 구절을 소개한다. “하얼빈은 바다가 없는 상하이(上海). 도시 전체가 엽기, 낭만, 모험이 뒤섞인 한 편의 소용돌이. 망명한 러시아 공작이 거리에서 행인의 구두에 광을 내고 러시아 장군의 정부(情婦)였던 볼쇼이 발레단의 일급 발레리나가 싸구려 무용복 입고 거리에서 불춤 추는 눈물의 도시. 중국 공산당이 지하에서 꿈틀거리는 과거와 미래의 교향곡.” 틀린 표현이 아니다. 만주국 시절 하얼빈은 그런 도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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