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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올림픽 열어야” 예술의전당 기획·부지 선정 주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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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호 27면

[김동호 남기고 싶은 이야기] 타이거 사람들 〈19〉 서울 ‘예술의전당’ 건립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은 수많은 사람의 협업으로 들어선 한국 최대·최고의 복합문화공간이다. 나는 문화공보부(문공부) 기획관리실장 시절(1980년 8월~88년 4월)에 기획에 참여했고, 부지·설계자 선정을 주도했으며, 추진상황을 수시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전관개관(오페라극장 준공)을 1년 앞두고 초대 사장을 맡았다. 그만큼 애정이 깃든 곳이기에 지금도 자주 찾는다.

1984년 11월 14일 열린 예술의전당·국립국악당 기공식. 당시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인 필자(왼쪽)가 전두환 대통령과 국회의원들, 문화계 인사들에게 공사 개요를 보고하고 있다. [사진 김동호]

1984년 11월 14일 열린 예술의전당·국립국악당 기공식. 당시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인 필자(왼쪽)가 전두환 대통령과 국회의원들, 문화계 인사들에게 공사 개요를 보고하고 있다. [사진 김동호]

예술의전당 건립은 80년 9월 30일 독일 바덴바덴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서울이 88년 여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게 계기가 됐다. 국내에선 서울올림픽은 문화올림픽으로 열어야 하며, 이를 위해 파리 퐁피두센터, 런던 바비칸센터나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같은 복합문화시설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비등했다.

예술의전당 건립이 재정적으로 가능해진 건 방송광고 영업대행에 따른 수입의 일부로 ‘언론공익자금’을 조성해 언론·방송과 문화·예술의 진흥사업에 사용할 수 있게 한 제도 덕분이다. 언론공익자금은 80년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 취임 뒤에 허화평 정무수석비서관과  허문도 정무1비서관이 주도해 그해 12월 31일 한국방송공사법을 제정, 공포하면서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81년 1월 20일엔 한국방송광고공사(현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설립돼 사장으로 홍두표 전 동양방송(TBC) 사장, 감사에 남응종 예비역 장군, 전무는 이기흥 한국일보 광고국장이 각각 발령받았다.

84년 기공식 때 지휘봉 들고 계획 보고

복합문화시설 건립 논의는 81년 말 청와대 정무팀과 방송광고공사를 중심으로 진행됐고, 82년 1월 6일 허문도 비서관이 문화공보부 차관을 맡으면서 표면화됐다. 82년 4월 10일 오전 10시 30분 홍두표 사장은 이광표 문공부 장관에게 예술의전당 건립 계획을 보고했다. 이 장관 지시에 따라 방송광고공사에 김수근·신용학·이강숙·황병기·유덕형·최순우·이경성·허규·이우환·문명대 등 10인의 문화예술인으로 자문위원회가 구성됐고, 이주혁을 국장으로 사무국이 설치됐다.

1986년 12월 4일자로 필자가 자필로 작성한 ‘예술의전당 임원 선임’ 기안서. 초대 이사장엔 윤양중, 건설본부장엔 서삼수, 기획운영본부장엔 김수득씨가 추천됐다. [사진 김동호]

1986년 12월 4일자로 필자가 자필로 작성한 ‘예술의전당 임원 선임’ 기안서. 초대 이사장엔 윤양중, 건설본부장엔 서삼수, 기획운영본부장엔 김수득씨가 추천됐다. [사진 김동호]

82년 5월 21일 이진희 MBC 사장이 문공부 장관을 맡아 예술의전당 건립사업을 진두지휘했으며, 기획관리실장인 나도 건립에 직접 관여하게 됐다. 82년 9월 30일 나는 문화공보부와 한국방송광고공사가 마련한 최초의 ‘예술의전당 건립계획’을 들고 이 장관과 함께 청와대에 가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재가를 받았다.

건립계획이 확정되자 부지 선정에 나섰다. 83년 1월 13일 서울 서초동 네거리의 당시 서울시청 예정부지(그땐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3만2245평에 세우는 걸로 대통령에게 보고해 재가를 받았지만, 서울시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난관에 빠졌다. 2월 10일 이 장관을 만난 김성배 서울시장은 3만 평 중 1만 평에는 서울시 예산으로 컨벤션 홀을, 1만 평에는 문화공보부 예산으로 예술의전당을 각각 조성하고 나머지 1만 평은 공유공간으로 하되 공동 설계를 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대로라면 복합문화시설의 조성은 불가능했다. 그 뒤 이곳엔 서울시청이 아닌 대법원과 대검찰청이 들어왔다.

5월 24일 서초동 서울시청 예정부지 뒤편의 군 정보사령부를 찾아가 부대장과 함께 돌아봤다. 정부 소유 땅과 교환한 뒤 부대가 그곳으로 이전한다는 원칙에는 합의했지만, 올림픽이 열리는 88년까지는 조성이 불가능했다.

2018년 예술의전당 개관 3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역대 사장들. 왼쪽부터 고학찬(12대), 필자 (초대), 허만일(2대), 이종덕(4대), 최종률(5대), 김순규(6대), 김용배(7배), 신현택(8대), 신홍순 (9대), 김장실(10대) 사장. [사진 김동호]

2018년 예술의전당 개관 3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역대 사장들. 왼쪽부터 고학찬(12대), 필자 (초대), 허만일(2대), 이종덕(4대), 최종률(5대), 김순규(6대), 김용배(7배), 신현택(8대), 신홍순 (9대), 김장실(10대) 사장. [사진 김동호]

5월 26일 우면산 일대를 답사했고, 27일엔 건축가 김원 소장이 추천한 성수동 강원산업 시멘트공장을 이 장관과 함께 돌아봤지만, 접근성이 떨어졌다. 그 결과 서초동 우면산 북단의 서초동 산 130번지 일대 8만3200평 부지를 제1안으로, 세종로 옛 서울고 부지(현 서울역사박물관)를 제2안으로 잡았다. 1안 부지는 당시 군사시설 보호구역이었고, 70필지를 39명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83년 7월 13일 오후 3시 장관과 함께 대통령에게 보고한 결과 이곳으로 결정됐다.

방송광고공사는 이기흥 전무를 책임자로 토지매입반을 구성해 부지 매입을 마쳤다. 나는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83년 11월 3일)와 건설부 중앙도시계획위원회를 거쳐 84년 5월 26일 도시계획 시행허가를 받아 해당 부지를 문화시설 용지로 변경했다. 9월 29일 오후 2시 30분 육군 참모총장을, 그 뒤 국방부 차관을 각각 만나 군사시설 보호구역도 해제했다.

건립사업을 맡은 문화예술진흥원은 83년 8월 1일 이주혁을 본부장으로, 신용학·김석철을 상임기획위원으로 예술의전당 건립본부를 구성했다. 8월 26일부터 9월 9일까지 음악·무용·연극·미술 등 각 분야 전문가 의견을 모으고, 문화예술인 800명을 대상으로 의견을 조사했다. 이를 정리해 83년 11월 4일 오전 10시 30분 대통령에게 규모와 기본설계 공모방법 등을 보고했다.

설계공모는 지명공모 방안을 택해 김수근·김중업·김석철과 영국 CPB건축연구소의 크리스토프 본, 미국 T.A.C. 건축연구소의 리처드 브루커 등 국내 세 명, 외국 두 명의 건축가를 선정했다. 문화예술진흥원의 송지영 원장(위원장), 건축가 김희춘, 한국건축가협회장 나상기, 한국건축사협회장 김지태, 무용평론가 박용구, 연극협회 이사장 김동훈, 방송광고공사 홍두표 사장 등을 위촉해 다섯 건축가가 제출한 설계(안)의 심사를 의뢰하고 나는 간사를 맡았다.

예술의전당 전경. [사진=김동호]

예술의전당 전경. [사진=김동호]

4월 23일부터 심사한 결과 ‘작품마다 접근방식이 상이하고 작품마다 장·단점이 있어 다섯 작품 중 어느 한 작품을 선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므로 한국건축가를 선정, 각 작품의 장점을 취합해 새로운 마스터플랜을 작성’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5월 4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주 건축가로 선정된 건축연구소 아키반의 김석철은 한국 전통미를 살려야 한다는 강박감에 적지 않은 고민과 갈등을 겪으며 설계를 완성해 84년 10월 25일 대통령 보고를 마쳤다.

사장 맡은 지 두 달 안 돼 문화 차관 발령

연건평 2만4500평에 대극장 2500석, 중극장 800석, 소극장 300석 규모의 축제극장(오페라극장)과 2200석의 음악당, 4개 전시실을 갖춘 미술관과 자료관, 교육관(나중에 서예관으로 설계 변경) 등 다섯 동을 짓기로 했다. 설계가 확정되고 시공사로 주식회사 한양이 선정됐다. 84년 11월 14일 건설 현장에서 ‘예술의전당 및 국립국악당’ 기공식이 열렸다. 전두환 대통령 내외와 국회의원, 문화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나는 지휘봉을 들고 조감도를 중심으로 건립계획을 보고했다. 이어 예술의전당 조성과 향후 운영을 이끌 재단법인을 설립해 12월 4일 초대 이사장에 윤양중 현대사회연구소장이, 이사 겸 건설본부장에 서삼수, 이사 겸 기획운영본부장에 김수득 KBS 감사가 각각 임명됐다.

나는 앞으로 운영을 맡을 전문인력 양성이 시급하다고 판단해 예술의전당 측과 협의해 예산 2억6000만 원으로 전체 예상 소요 인원 290명 중 104명을 먼저 양성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87년 1차로 19명을 공채 선발해 6개월간 파리 퐁피두센터, 런던 바비칸센터와 미국 링컨센터에 각각 해외연수를 보냈다. 양성 계획은 2차를 끝으로 아쉽게도 중단됐지만, 연수를 다녀온 1, 2기 공채 출신들이 그 뒤 예술의전당을 핵심적으로 이끌었다.

공사는 85년 9월 16일 음악당을 시작으로 착착 진행돼 88서울올림픽을 앞둔 88년 2월 1일 음악당과 서예관이 1단계 준공됐다. 나는 그 직후인 88년 4월 4일 기획관리실장에서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91년 12월 30일 문화공보부 시절 함께 많은 일을 했던 이수정 대통령 공보수석비서관이 문공부 장관으로 부임했다. 92년 1월 20일 신임 이 장관과 점심을 함께하면서 전관 개관을 1년 앞둔 예술의전당의 향후 운영방안에 관한 의견을 나눴다. 이 장관은 이사장제로 운영하던 예술의전당을 사장 중심의 책임경영 체제로 바꾸고, 92년 2월 24일 나를 초대 사장으로 임명했다.

나는 부임하자마자 전 직원은 물론 많은 문화계·언론계 인사에게 자문을 얻어 ‘예술의전당 운영개선(안)’을 작성했다. 이 장관을 거쳐 4월 20일 정원식 총리에게 보고했는데, 바로 그날 문화부 차관으로 발령받았다. 불과 2개월도 되지 않아 예술의전당을 떠나 무척 아쉬웠지만, 나를 초대 예술의전당 사장과 2대 문화부 차관으로 각각 발탁한 고 이수정 장관에게 아직도 고마운 마음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정부예산 없이 언론공익자금만 1550억원 이상을 투입한 예술의전당은 93년 2월 15일 오페라극장이 완공되면서 전관이 개관했다. 독립기념관과 함께 전두환 대통령의 의지와 집념, 그리고 집권 초에 마련한 방송광고에 의한 언론공익자금이 아니었으면 불가능 했을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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