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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 공포 체험하고 요리 맛보고, 이런 공연은 없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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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호 23면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몰입형’ 공연 바람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공연중인 다크필드 3부작 중 ‘고스트쉽’. [사진 LG아트센터]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공연중인 다크필드 3부작 중 ‘고스트쉽’. [사진 LG아트센터]

좁은 컨테이너 안.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빼곡히 마주앉은 30명이 각자 헤드셋을 썼다. 불이 꺼지면 칠흑같은 어둠이다. 웬 남자가 들어와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얹고 절대 떼지말라”고 속삭인다. 그가 테이블 위를 걸어다니면서 “곧 세상을 떠난 친구나 가족을 불러 올 것”이라며 믿음을 가지라고 반복한다. 한동안 비슷한 대사가 이어지며 지루해질 때쯤 테이블로 뻗은 팔이 왠지 불편하다. 슬쩍 손을 거둬들이고 싶어지는 미묘한 거리와 시간이다. 믿음을 갖고 손을 떼지 않을 것인가, 불편하니 손을 뗄 것인가. 두 가지 선택에 따라 한 공간에서 똑같은 소리를 듣고 있는 30명의 사람들은 전혀 다른 감정을 체험하게 된다.

LG아트센터 서울의 개관 페스티벌로 선보이고 있는 영국의 이머시브(몰입형) 공연 다크필드 3부작 중 ‘고스트쉽’이다. 1년만에 재가동된 LG아트센터가 블랙박스 형태 U+스테이지의 첫 작품으로 야심차게 내놓은 기획인데, 이 배에 승선하면 그 선택에 따라 평생 경험해본 적 없는 공포를 느낄 수도 있다. 다른 두 작품 ‘코마’와 ‘플라이트’도 비슷한 상황극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마치 설국열차 침대칸처럼 비좁은 침대 위에 드러눕거나, 안전을 신뢰할 수 없는 비행기 좌석에 앉아 기괴하고 섬뜩한 체험을 하게 된다. 살면서 누구에게 들어볼 수도 없는 경험들이다. 실제 상황을 경험했다면 대부분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무대·객석 경계 없어 관객이 주인공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참가작인 리미니 프로토콜의 ‘부재자들의 회의’. [사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참가작인 리미니 프로토콜의 ‘부재자들의 회의’. [사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이제 공연의 경쟁상대는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다. 집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즐길만한 콘텐트가 넘쳐나는 시대에 사람들을 어딘가로 불러모으려면, 단순한 감상을 넘어 경험치를 끌어올리는 게 관건이 됐다. 몸소 액티비티에 참여하는 놀이동산과 경쟁하게 된 셈인데, 다크필드 3부작도 실제로 연극세트처럼 만들어 놓은 ‘유령의 집’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컨셉트다.

이런 ‘이머시브 씨어터(immersive theater)’는 국내에서도 코로나19 이전에 막 유행을 타다 팬데믹으로 직격탄을 맞았는데,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2003년 영국에서 시작돼 2011년 뉴욕 제작자의 손길을 거쳐 재탄생된 펀치드렁크의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 부터 핫해졌다. 버려진 건물을 호텔처럼 꾸며 놓고, 관객이 객실을 돌아다니며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히치콕의 스릴러 ‘현기증’을 결합한 무언극에 참여하는 컨셉트가 폭발적 반응을 얻었고, 이후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없애고 관객이 주인공이 되는 공연이 속속 생겨났다.

다크필드는 소리에 집중한다는 게 특별하다. 2016년 영국의 작가와 음향디자이너가 결성한 창작단체로, 360도 입체음향을 디자인해 실제 배우는 없고 녹음된 목소리와 약간의 진동만 있는 완전히 새로운 공연 형태를 만들어냈다. 2017년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처음 선보인 ‘고스트쉽’이 대박을 친 후 ‘플라이트(2018)’와 ‘코마(2019)’를 잇달아 내놓으며 공연계 가장 핫한 단체로 세계를 돌고 있다. 팬데믹 동안에는 온라인으로 감상하는 ‘다크필드 라디오’ 시리즈를 내놓았는데, 집에 혼자 앉아서 100% 청각에 의존해 상상 속 오감이 폭발하는 체험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이번에 선보인 3부작은 공포체험이지만, 다 그런 건 아니다. 다크필드의 글렌 니스 예술감독은 “어둠 속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공포와 불편함을 캐치해 집중적으로 강렬한 쇼를 만들었다”면서 “지금은 아이들에게 어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줄 만한 쇼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다시 공연계 대세가 된 이머시브 씨어터는 티켓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10월 초부터 진행 중인 2022 서울 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 가장 핫했던 공연도 독일의 다큐멘터리 연극 단체 리미니 프로토콜의 ‘부재자들의 회의’였다. 올해 SPAF는 전면적으로 대면 공연을 재개하면서 ‘전환’을 주제로 내걸고 기후변화·환경·여성·퀴어 등 새로운 서사를 풀어낼 것이라 선언하며 23개 작품을 선보였는데, ‘부재자들의 회의’는 그중 여러 키워드를 포괄하면서 형식 면에서도 다큐멘터리와 이머시브가 결합된 참신한 형태였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참가작인 리미니 프로토콜의 ‘부재자들의 회의’. [사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참가작인 리미니 프로토콜의 ‘부재자들의 회의’. [사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엄청난 탄소 발생과 막대한 호텔 이용료를 일으키는 대규모 컨퍼런스의 유행에 대한 비판과 대안적 사고를 연극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무대다. 팬데믹 기간 디지털 화상 회의로 대체되기도 했지만, 수많은 사람의 모임이 아니라 부재자들끼리 연극의 형식을 빌어 회의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아이디어다. 아무도 이동하지 않고, 온라인으로 동시에 열리는 것도 아닌 ‘지극히 아날로그한 국제 컨퍼런스’라는 급진적 실험이다.

허구의 드라마가 아니라 실존인물 9명이 ‘부재’를 주제로 삼은 컨퍼런스에서 발표를 하는 메타 형식이다. 부재자들은 대리인의 입을 빌려 ‘부재’를 키워드로 유대인 차별, 인구과잉, 소말리아 내전 같은 꽤 심각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배우가 문학적 대사를 읊는 게 아니라 실재하는 부재자의 발언을 대신하는 공연인데, 전문 배우는 한명도 없다는 게 특별하다. 마치 시상식 대리 참석자가 수상 소감을 대신 읽는 것처럼, 관객들이 무대로 나가 부재자의 대리인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마추어 배우 체험’인 셈이다. 실제로 연극영화과 학생들이 단체로 실습을 나온 듯 참여의지를 불태웠다. 준비된 배우들이 대사를 숙지한 게 아니라 일반인들이 헤드셋에서 들려오는 대사를 순간적으로 따라해야 하니 실수가 있고 내용 전달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실험’인 만큼 완성도는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든 그 무엇이든,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냈다는 데방점이 찍힌다.

철학·오락적 유희 등 작품 주제 다양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공연중인 이머시브 다이닝 ‘그랜드 엑스페디션’. [사진 아이엠컬처]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공연중인 이머시브 다이닝 ‘그랜드 엑스페디션’. [사진 아이엠컬처]

흥미롭게도 다크필드 공연장에 모인 관객들은 리미니 프로토콜을 얘기했고, 리미니 프로토콜 공연장에선 여기저기서 ‘다크필드 언제 보러가냐’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머시브 씨어터’의 귀환에 공연 마니아들이 한껏 들떠있는 모양새다. 다크필드가 ‘슈뢰딩거의 고양이’같은 철학적 은유를 담고 있고 리미니 프로토콜이 환경 이슈를 제기하듯, 몰입형 공연은 낯선 감각의 경험이 진지한 사유로 연결되곤 한다. 그런데 아예 엔터테인먼트로 체화된 형태도 있다.

9월말 국내에 상륙한 이머시브 다이닝 ‘그랜드 엑스페디션’은 몰입형 공연을 파인 다이닝과 결합했다. 2010년부터 영국에서 비밀 콘셉트의 다이닝 브랜드로 인기를 끌고 있는  ‘GINGERLINE’의 스테디셀러로, 연극 ‘더 헬멧’‘카포네 트릴로지’, 뮤지컬 ‘오늘 처음 만든 뮤지컬’ 등 참여형 공연을 만들어온 공연제작사 아이엠컬처가 인터파크와 합작으로 들여왔다.

런던 빅토리아 라인 비밀의 장소에서 벌어지는 원작의 출발지를 서울로 옮겨온 만큼, 공연장도 꽁꽁 숨겨져 있다. 이정표도 없어 어렵사리 도착한 공연장 문이 열리면 압도적인 크기의 동화책 속으로 들어가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동참하는 콘셉트다.

열기구 모양의 테이블에 앉으면 조명과 미디어아트 맵핑이 유기적으로 흘러가며 그리니치부터 홋카이도, 시베리아, 리우데자네이루, 우주공간까지 데려간다. 각 도시를 상징하는 요리를 맛보면서 퍼포먼스를 즐기고 림보나 낚시, 기차놀이 같은 액티비티에 직접 참여하며 그 지역 특유의 축제 현장을 즐기는 콘셉트다. 3년째 미슐랭 1스타를 유지하고 있는 레스토랑 ‘에빗(EVETT)’의 오너 셰프 조셉 리저우드가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각 지역의 요리도 맛깔스럽다. 글로벌한 유명세 덕에 티켓 오픈 직후 공연예술 통합전산망 일간 순위 2위에 오르는 등, 새로운 경험에 목마른 MZ세대 사이에 핫플레이스로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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