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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범석의 살아내다

죽기 직전 뭘 봤길래…죽여달라던 암환자 "살고 싶어요" 절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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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석 서울대 암병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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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 좀 빨리 죽게 해주세요.” 폐암 말기였던 그녀는 회진 때 마다 나에게 빨리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계속 물었다. 어차피 완치도 안되고, 항암치료를 해도 좋아질 가망성이 없어 보이고, 삶을 조금 더 연장하는 것 뿐인 이런 치료를 계속 받기가 고통스럽다고 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고통인 이런 삶을 어서 마감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왜 안락사가 안되냐며 따져 물었다.

그녀는 이런 말도 했다. “저에게는 희망이 조금도 없습니다.” 희망을 갈구하는 존재인 인간은 절망이 절망을 낳고 내일은 더 나빠질 것이라는 예측만 남을 때 무너진다. 삶이 밑바닥까지 추락해서 이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 싶었는데, 지하실문이 열리더니 지하실로 내려가고, 또 다시 지하실문이 열리고…. 그렇게 추락과 추락을 거듭하다보면 인간은 삶의 잔혹성에 질려 버리기 마련이다.

이럴 때 죽음만이 나를 구원해 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 고통스럽기 전에 여기서 빨리 삶을 마감하는 일이 내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러운 선물이라 여기게 된다. 스스로 희망을 끊고 절망을 선택한 상황에서 죽음은 유일한 탈출구가 되어 버린다. 자살하는 적잖은 사람들의 심리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녀도 그랬다. 그렇게 하루 하루 지나면서 암이 나빠지자 죽음이 한발짝씩 다가왔다. 호흡곤란이 심해지며 숨이 거칠어졌고 열이 나기 시작했고 혈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급작스럽게 오는 죽음도 있지만 그녀에게 죽음은 서서히 오는 형태였다. 이제는 소원대로 고통이 끝나나 보다 했는데, 그녀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스웨덴 작가 아우구스트 말름스트롬(1829~1901) 작품의 일부.

스웨덴 작가 아우구스트 말름스트롬(1829~1901) 작품의 일부.

“선생님 저 살고 싶어요. 너무나 간절히 살고 싶어졌어요.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녀는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꾼 것일까. 죽음에 이르러서야 왜 살고 싶다는 말을 했을까. 그녀는 깊디 깊은 절망의 끝에서 무엇을 보았길래 그러는 걸까? 빨리 죽게 해달라던 그녀가 죽음 직전에 이르러 삶의 의욕을 드러내자, 나는 이것이 그저 살고자 하는 본능인지 죽음에 대한 실체적 두려움인지 아니면 단순 변심인지 알기 어려웠다.

예전에 법의학 수업시간에 목매어 자살하는 사람이 손으로 목에 매인 끈을 풀려고 발버둥 쳐서 손이 목줄 사이에 끼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자살하려던 사람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처럼 마음을 바꾸는 일은 생각보다 많다고 한다. 품위있게 죽고 싶다며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하지 않겠다고 사전연명의료계획서를 다 써 놓았던 환자 중에서도 막상 임종의 순간이 다가오자 인공호흡기도 달고, 중환자실도 가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겠다고 마음을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경우를 보면서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 역시도 내 죽음이 목전에 이르면 어떻게 변할지 예단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죽음 앞에서는 절대 까불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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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들을 그저 단순 변심으로 치부하기엔 내가 모르는 심오한 어떤 것이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녀는 삶의 끝자락, 죽음의 초입에서 무언가를 본 것이 아닐까 싶었다. 지하실 밑바닥에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보았던지, 절망 끝에서 진짜 희망을 보았던지, 죽음 끝에서 삶을 보았던지, 여하튼 무언가를 보았기에 변하지 않았을까?

그녀가 살고 싶다는 말만 남긴 채 떠났으므로 나는 그녀가 무엇을 보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깊디 깊은 절망의 나락에서 인간을 구원해 주는 무언가가 있고 그녀는 그것을 보았으리라 짐작해봤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만 보이는 그것은 우리를 삶으로 인도하는 어떤 강력한 힘 같은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봤다. 흔히들 죽으면 끝이라 생각하지만, 죽음의 모습은 그리 간단치 않다. 삶은 죽음을 예단하지도 재단하지도 못한다. 죽음은 삶을 알지만 삶은 죽음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