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이 73세…할아버지 감독님의 위대한 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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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스턴 더스티 베이커 감독(앞)이 25일 월드시리즈 진출을 확정한 뒤 기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휴스턴 더스티 베이커 감독(앞)이 25일 월드시리즈 진출을 확정한 뒤 기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현재 KBO리그에서 가장 연차가 높은 사령탑은 KT 위즈 이강철(56) 감독이다. 1966년생으로 10개 구단 수장 중 나이가 가장 많다. 그나마도 올 시즌까지는 두산 베어스를 이끌었던 동년배 김태형(55) 감독이 있었지만, 두산이 김 감독과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서 1960년대생 사령탑으로는 이 감독이 유일해졌다. 이제 이 감독을 제외한 나머지 사령탑들은 모두 1970년대 출생자들이다.

그러나 이 감독도 메이저리그에선 선임 지도자라는 명함을 내놓지도 못한다. 연배가 한참 위인 사령탑이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바로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지휘하고 있는 더스티 베이커(73·미국) 감독이다.

194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서 태어난 베이커 감독은 1960년대부터 메이저리그에서 선수로 뛰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LA 다저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외야수를 봤다.

통산 2039경기를 소화할 만큼 만만치 않은 존재감을 보였던 베이커 감독은 은퇴 후 지도자로서 더욱 두각을 나타냈다. 1993년부터 샌프란시스코 지휘봉을 잡은 뒤 시카고 컵스와 신시내티 레즈에서 계속해 감독으로 일했다. 대단한 점은 이 기간 공백기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2007년 딱 한 해만 쉬었을 뿐이다.

이어 2015년 말 워싱턴 내셔널스 사령탑으로 돌아온 베이커 감독은 2017년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 탈락을 끝으로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이때 나이 예순여덟. 고령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지도자로서 가을야구에서 유독 약하다는 평가가 뒤따르며 더는 현장으로 복귀하지 못하리라는 전망이 메이저리그 안팎에서 나왔다.

실제로 베이커 감독은 워싱턴과 작별한 뒤 처음 감독을 지냈던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행정 업무를 시작했다. 최고 경영자의 특별고문으로 구단 살림을 챙겼다.

평소 이쑤시개를 무는 버릇이 있는 더스티 베이커 감독. AP=연합뉴스

평소 이쑤시개를 무는 버릇이 있는 더스티 베이커 감독. AP=연합뉴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시간조차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20년 1월, 사인 훔치기 논란으로 난파선이 된 휴스턴으로부터 러브콜이 왔다.

당시 휴스턴은 투수 마이크 파이어스의 폭로로 2017년 월드시리즈에서의 불법적인 행태가 드러났다. 구장 곳곳 설치한 몰래카메라를 통해 상대 사인을 훔친 뒤 이를 휴지통을 두드려 공유하는 수법이 밝혀져 파문을 일으켰다. 결국 사건 당사자였던 A.J. 힌치 감독이 물러났고, 관련자들도 여럿 옷을 벗었다.

최악의 스캔들을 일으킨 휴스턴은 결국 구단 안팎의 분위기를 추스를 수 있는 지도자를 찾았다. 많은 이름이 거론된 가운데 낙점을 받은 사령탑은 현장 경험이 풍부한 일흔한 살 백전노장이었다. ‘한국야구 삼김’으로 불리는 김응용(81)-김성근(80)-김인식(75) 감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1940년대생 할아버지 사령탑의 그라운드 복귀였다.

반신반의 속에서 지휘봉을 다시 잡은 베이커 감독은 부임과 함께 특유의 온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얼굴로 사인 훔치기를 비판하는 이들을 대했고, 선수들에겐 특유의 유머를 내뱉으며 분위기를 추슬렀다.

이렇게 휴스턴을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2위로 이끌면서 자신이 지휘한 5개 구단을 모두 포스트시즌으로 올려놓는 메이저리그 최초의 기록을 쓴 베이커 감독. 1+1년 계약이 끝나는 지난해에는 월드시리즈까지 진출하면서 계약을 1년 연장해 올 시즌에도 지휘봉을 잡았다.

이처럼 굴곡진 30년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베이커 감독은 이제 사령탑으로서 이루지 못한 단 하나의 꿈만을 앞두고 있다. 바로 월드시리즈 우승이다. 휴스턴은 29일(한국시간)부터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7전 4승제의 월드시리즈를 치른다.

휴스턴은 이번 가을야구에서 짜임새 있는 투타 전력을 앞세워 상대를 물리쳤다. 먼저 디비전시리즈에서 시애틀 매리너스를 3승 무패로 꺾은 뒤 챔피언십시리즈에서도 강호 뉴욕 양키스를 4승 무패로 제압해 손쉽게 월드시리즈까지 올라섰다.

그러나 마지막 상대인 필라델피아는 만만치 않다는 평가다. 잭 휠러와 애런 놀라로 이어지는 원투펀치가 마운드를 지키고 있고, 3년 전 영입한 브라이스 하퍼가 타선을 이끈다. 물론 가을야구 경험이 풍부하고 백전노장이 이끄는 휴스턴이 여전히 유리하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번 1차전을 기준으로 역대 월드시리즈 최고령 사령탑이 되는 베이커 감독은 챔피언십시리즈 직후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고 했다. 일흔셋 노장의 야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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