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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킹] 가을비가 내리는 뉴욕과 어울리는 코냑은

중앙일보

입력

정인성의〈영화로운 술책〉

여러분은 술에 무엇을 곁들이시나요. 맛있는 안주, 아니면 신나는 음악? 혹시 소설과 영화는 어떠세요? 재미있는 이야기와 함께 술을 마시는 시간은 색다른 몰입감을 선사해 줍니다. 술 마시는 바와 심야서점이 더해진 공간, ‘책바(Chaeg Bar)’가 탄생한 배경이기도 하죠. 책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술은 단순한 소품을 넘어 등장인물의 심리, 장면의 분위기, 상황의 메시지를 전달하곤 합니다. 책과 영화 그리고 술을 사랑하는 정인성 대표가 맛있는 술과 가슴속에 깊이 남을 명작을 함께 추천해 드립니다.

티모시 샬라메가 연기한 '레이니 데이 인 뉴욕' 속 개츠비. 사진 네이버 영화

티모시 샬라메가 연기한 '레이니 데이 인 뉴욕' 속 개츠비. 사진 네이버 영화

3년 만에 떠나는 휴가의 목적지는 뉴욕이었다. 뉴욕의 가을은 동명의 재즈곡과 영화가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데, 떠날 수 있는 날이 마침 가을의 한복판이었다. 출국 전날, 넷플릭스에서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Rainy Day in New York)’을 다운받았다. 어떤 나라로 떠날 때마다 그 나라의 영화나 소설을 비행기에서 미리 챙겨보는데, 그렇게 하면 낯설기만 한 나라와 내적 친밀감이 생겨 정서적인 시차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레이니 데이 인 뉴욕(2019)’은 우디 앨런 감독에 티모시 샬라메와 엘르 패닝 그리고 셀레나 고메즈가 출연한 영화다. 우디 앨런은 가히 뉴욕 전문 감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브루클린 출생에 뉴욕대에서 공부했고 이미 ‘맨하탄(1979)’,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1996)’ 등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만든 바 있다. 그가 최근의 시선으로 담은 뉴욕이 보고 싶었다.

티모시 샬라메가 연기한 개츠비(뉴욕 배경인데 무려 이름이 개츠비다! 이름을 듣자마자 웃음 터지게 만드는 우디 앨런의 능력이란)는 뉴욕 근교의 야들리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다. 여자친구는 애리조나 투손의 거물 은행가 딸인 애슐리(엘르 패닝). 애슐리는 교내 영화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마침 기회가 생겨 평소 좋아하는 감독인 롤런드 폴러드를 맨해튼에서 인터뷰할 기회를 얻게 된다. 개츠비는 애슐리에게 자신의 고향인 뉴욕 구경을 시켜줄 생각에, 애슐리는 인터뷰할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맨해튼으로 향한다.

영화에서 연인으로 등장한 개츠비(티모시 샬라메)와 애슐리(엘르 패닝). 사진 네이버 영화

영화에서 연인으로 등장한 개츠비(티모시 샬라메)와 애슐리(엘르 패닝). 사진 네이버 영화

애슐리가 롤런드 폴러드를 인터뷰하는 동안 개츠비는 맨해튼 시내를 거닌다. 마침 고등학교 친구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또 다른 친구가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영화를 찍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니치 빌리지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재즈바 ‘빌리지 뱅가드(Village Vanguard)’와 ‘블루노트(Blue note)’뿐만 아니라, 휘트니 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과 갖가지 맛집들이 즐비한 동네다. 개츠비는 영화 촬영 중인 친구를 직접 만나게 되고, 그 친구는 개츠비에게 엑스트라로 출연할 것을 권한다. 하필이면 역할은 키스신 당사자 중 한 명이고, 상대는 전 여자친구의 동생인 챈(셀레나 고메즈)이다. 말이 되는 전개일까 싶지만, 이곳은 자유의 도시 뉴욕이고 더군다나 우디 앨런의 영화 아닌가.

그동안 애슐리는 롤런드 폴러드에게 푹 빠진 상태였다. 그가 자신의 작품에 열정적으로 관심 보이는 애슐리에게 특종을 알려주고, 신작 테스트 상영에 초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테스트 상영을 본 뒤 자기 혐오에 빠져 자리를 급히 뜬다. 무언가를 창작하는 사람은 충분히 공감할 만한 장면인데, 나 역시 신나게 초고를 쓰다가 몇 시간 뒤에 퇴고하게 되면 셀프 비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곤 한다. 그가 급히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자 애슐리는 당황한다. 테스트 상영을 함께 보던 각본가 테드 다비도프(주드 로)는 태연하게 애슐리에게 말한다.

“그는 자기 혐오에 빠져 어디선가에서 코냑을 마시며 우리의 일을 망칠 새로운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 거야.”

나폴레옹의 꼬냑이라고도 불리는 쿠르부아지에. 병목 부분에 나폴레옹을 상징하는 로고가 있다. 사진 Courvoisier 홈페이지

나폴레옹의 꼬냑이라고도 불리는 쿠르부아지에. 병목 부분에 나폴레옹을 상징하는 로고가 있다. 사진 Courvoisier 홈페이지

번역한 자막에는 ‘코냑(프랑스 코냑 지역에서 생산되는 브랜디의 종류)’이라고 등장했지만, 그가 실제로 말한 술은 코냑의 브랜드인 ‘쿠르부아지에’였다. 헤네시, 까뮤, 레미 마틴 같은 메이저 브랜드에 비하면 덜 알려졌지만 쿠르부아지에는 오랜 역사를 가진 브랜디다. 특히 나폴레옹에게 사랑받아 ‘나폴레옹의 코냑’이라고도 불린다. 쿠르부아지에 역시 이를 마케팅 포인트로 활용해 라벨에 그를 형상화한 로고를 새겨놓았다.

쿠르부아지에의 특징은 다른 메이저 브랜드와 달리 직접 소유한 포도밭이 없다는 점인데, 대신 오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와인 생산자와 증류소로부터 구매한 다양한 원액을 블렌딩해 코냑을 만든다. 그렇다면 롤런드 폴러드는 왜 ‘쿠르부아지에’를 마셨을까. 영화 속에서 그는 상업적인 타협을 하지 않는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감독으로 묘사되고 있다. 대중적인 작품을 만드는 감독이 아니기에, 메이저에서 조금은 비켜난 쿠르부아지에를 좋아하는 취향이 사뭇 어울린다.

뉴욕의 브랜디 라이브러리에서 마신 쿠르부아지에 한 잔. 사진 정인성

뉴욕의 브랜디 라이브러리에서 마신 쿠르부아지에 한 잔. 사진 정인성

뉴욕에 도착한 뒤 첫 번째 술로 쿠르부아지에를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소호 남쪽에 있는 바 ‘브랜디 라이브러리(Brandy Library)’. 그야말로 코냑 마시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역시나 쿠르부아지에는 있었고 VSOP 등급으로 한 잔 주문했다(XO를 마시기에는 뉴욕의 물가와 환율이 엄청났다). 그날은 영화 속 배경처럼 비가 내렸는데, 움츠러들었던 몸이 나른해질 정도로 달콤하고 부드러운 한 잔이었다. 코냑은 가을과 잘 어울리는 술이다. 날씨가 한결 추워졌을 때는 따뜻하게 데워 마시기도 한다. 손에서 전달되는 온기로 천천히 데우기도 하는데, 이에 적합한 디자인의 글라스를 ‘스니프터(Snifter)’라고 부른다. 비록 브랜디 라이브러리의 글라스는 스니프터가 아니었지만, 손바닥 위에 놓으며 데우기에는 충분했다.

비 내리는 맨해튼에서 챈과 개츠비. 사진 네이버 영화

비 내리는 맨해튼에서 챈과 개츠비. 사진 네이버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뉴욕의 곳곳을 감상하기에 훌륭한 영화였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센트럴 파크와 같은 명소뿐만 아니라, 길거리의 풍경 자체를 보는 재미가 있다. 더불어 재즈가 가득한 OST는 낭만적인데, 그중에서도 티모시 샬라메가 부르는 ‘Everything happens to me’는 제목 그대로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이 도시만의 분위기가 전달된다. 언젠가 뉴욕에 방문할 예정이시라면 그 전에 한 번 보시는 걸 추천한다. 그때 술 한 잔을 할 수 있다면 손에 ‘쿠르부아지에’가 쥐어져 있길.

정인성 책바 대표, 작가 cook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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