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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유홍준의 문화의 창

김가진·김의환·김자동 3대의 독립운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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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김자동(1928~2022) 회장이 지난 8월 23일 별세했다. 지난 여름, 내가 상해임시정부 답사기를 위하여 한번 만나 뵙고 싶다고 임재경 선생을 통해 말씀드렸을 때 고인도 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며 몸이 좀 나으면 꼭 만나자고 하셨는데 만남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고인의 할아버지인 동농 김가진(1846~1922), 아버지인 김의환(1900~ 64), 어머니인 정정화(1900~91) 등은 모두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였고 고인은 ‘상해 임시정부의 아들’로 불리어 왔다.

이 3대에 걸친 독립운동은 동농이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면서 시작되었다.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한 동농은 주일공사와 농상공부대신을 지냈고 갑오개혁이 실패한 뒤에는 독립협회 위원으로 되었다. 독립문의 문패는 한자, 한글 모두 동농의 글씨이다.

동농 김가진은 임시정부로 망명
아들 김의환은 광복군 간부
며느리 정정화는 임정 살림꾼
손자 김자동은 ‘임정의 아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때 동농은 격렬히 반대했으나 좌절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대한협회 제2대 회장으로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한일강제합병 후 일제는 예우차원에서 그에게 남작 작위를 수여하였다. 훗날 이를 반납하였지만 이때 처음부터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의 행적에 한 오점으로 되었다.

그리고 3·1운동을 목격한 동농은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를 맡아 일제에 저항했으나 조직원들이 대부분 체포되자 그 해 10월,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허름한 늙은이로 변장하고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장명국 『대동단 총재 김가진』, 석탑 2021) 박은식은 『한국 독립운동 혈사』에서 임시정부는 동농의 망명을 열렬히 환영하며 최고 원로로 대우했다고 증언하였다. 대한제국의 고위 대신이 임시정부에 동참했다는 것은 여느 인사가 들어온 것과는 차원이 다른 천군만마의 상징성이 있었다. 그러나 동농은 망명한 지 3년만인 1922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임시정부는 동농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백운동천’ 동농 김가진의 집 뒤 쪽 바위에 새겨진 글씨.

‘백운동천’ 동농 김가진의 집 뒤 쪽 바위에 새겨진 글씨.

동농의 아들 김의환은 조선민족대동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부친이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할 때 길눈으로 함께 떠나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쫓겨날 때 김의환은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가흥(자싱)으로 가서 임시정부 선전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43년에는 광복군 조직훈련과장, 1945년에는 선전과장을 지냈다. 광복 후 귀국해서는 1948년 4월 한독당 대표로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회의에 참가하였는데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동농이 아들과 함께 망명한 뒤 서울에 홀로 남아 있던 며느리 정정화는 시아버님을 모시겠다고 뒤따라 상해로 갔다. 이후 정정화는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나들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으며 26년간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았다. 훗날 정정화는 그 고난의 역정을 기록한 『장강일기』(학민사 1998)를 펴냈다. 임시정부가 어떤 환경에서 생활했는가를 이 책만큼 감동적으로 전하는 기록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동농의 손자인 김자동은 임시정부 청사에서 태어나 김구, 이동녕, 이시영 등 임정 인사들의 품에서 자랐다. 이국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임정 요원들은 이 아이에게서 가족애를 느꼈던 것이다. 김자동은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푸른역사 2018)에서 1930년대 임시정부를 생생히 기록하였다.

훗날 정부에서는 김의환, 정정화, 김자동에게 대한민국 애국훈장을 수여하였다. 그러나 동농은 일제의 작위를 받았다는 이유로 애국훈장이 수여되지 않았다. 김자동은 이런 처사를 너무도 억울해 했다고 한다. 아마도 나를 만나면 이를 호소하려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에게 이에 대해 의견을 물었더니 선(先)친일이라도 후(後)독립운동이면 애국으로 인정해야 하는 건데 하물며 임시정부로 망명한 동농을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한 처사라고 했다.

올해는 동농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인지라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난다. 임형택 교수가 근래에 발표한 『동농 김가진, 그의 한시』에는 ‘독립신문’에 실린 동농의 망명시가 소개되어 있다.

‘나라가 깨지고 임금도 잃고 사직이 무너졌도다 / 치욕스런 마음으로 죽음을 참고 여태 살아왔다만 / 비록 몸은 늙었지만 아직도 하늘 찌를 뜻이 있어 / 단숨에 높이 몸을 솟구쳐 만리 길을 떠나노라.’

동농 3대의 독립운동은 충절로 유명한 안동 김씨의 가풍을 이은 것이었다. 동농은 병자호란 때 순절한 선원 김상용의 후손이다. 김상용은 척화파로 청나라에 끌려간 청음 김상헌의 친형으로 우의정까지 지낸 대신이었다. 서울 청운초등학교 뒤쪽 언덕길에는 김상용이 살던 청풍계 터에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암각 글씨가 이 집안의 청절을 칭송하고 있다.

그리고 창의문 뒤쪽 북악산 자락에는 동농이 살던 집 뒤뜰 바위에 새긴 ‘백운동천(白雲洞天)’이라는 암각글씨가 남아 있어 이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온 몸을 바친 위대한 청절 가문을 기려보게 한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