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현상의 퍼스펙티브

일본 따라잡는 사이 대만에 추월 당할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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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한·일 1인당 GDP 역전되나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세계적인 강(强)달러 현상이 뜻밖의 선물(?)을 안겼다. 한·일 경제 역전의 꿈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달 발표한 ‘세계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올해 한국과 일본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각각 3만3592달러, 3만4358달러로 전망했다. 불과 766달러 차이다.

IMF가 집계한 지난해 한국과 일본의 1인당 GDP 차이는 4297달러(한국 3만5004달러, 일본 3만9301달러). 그 차이가 한 해 만에 3500달러나 좁혀졌다. 현재 150엔 선에 육박하는 달러당 엔화 가치가 더 떨어지면 사상 최초로 한·일 명목 1인당 GDP의 역전이 현실화할 수 있다.

구매력(PPP) 기준 이미 한·일 역전
엔 추락으로 ‘명목’도 바뀔 가능성

쌓아놓은 곳간 아직 든든한 일본
“엔보다 원 더 불안” 경고 유념해야

성장 부진 한·일 주춤하는 사이에
경제 체질 바꾼 대만 급속 추격세

이현상의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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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역전 드라마를 마냥 즐기기엔 상황이 녹록지 않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경제 변수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 달러 대비 원화는 20% 하락했지만, 엔화는 30%나 떨어지면서 두 나라의 달러 표시 GDP 격차가 확 좁아졌다. 우리가 잘해서라기보다는 일본이 못해서라는 이야기다.

게다가 세계 경제 전체로 보면 한국은 제자리를 지키기도 버겁다. 지난해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GNI)에서 이탈리아에 다시 뒤처졌다. 2020년 코로나19 와중에 G7 국가 이탈리아를 제쳤다고 환호한 지 불과 1년 만이다. 1인당 명목 GDP에서도 우리가 일본을 따라잡는 사이 대만이 어느새 우리를 추월할 기세다.

정말 일본은 만만해졌나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한·일 소득 역전은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물가와 환율 수준을 반영한 구매력 평가(PPP) 기준 1인당 GDP는 2018년 이미 한국이 일본을 추월했다. (한국 4만3001달러, 일본 4만2725달러, 전국경제인연합회 자료) 그러나 국가 간 경제 규모 비교에 주로 쓰이는 명목 GDP에서 역전은 좀 더 ‘공식적’ 의미를 갖는다. 대부분 경제연구 기관은 일러야 2027년쯤 한국이 명목 1인당 GDP에서 일본을 추월할 것이라 봤지만, 그 실현이 앞당겨질 가능성이 커졌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격차는 아직 엄연한 현실이다. 일본이 그동안 쌓아놓은 부(富)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일본의 외화보유액은 9월 말 기준 1조2380억 달러. 전 세계 2위다. 한국의 3배 수준이다. 지난 5월 일본 재무성이 발표한 대외순자산(대외채권-대외채무)은 411조엔. 31년째 세계 1위다. 한국의 7배 정도다. 버블 경제 때 사들였던 세계 곳곳의 자산이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수익을 낳고 있다. 한국이 어렵게 돈을 벌어 겨우 작은 건물 하나 마련한 월급쟁이라면 일본은 이미 커다란 빌딩을 보유한 자산가인 셈이다.

든든한 곳간 때문에 엔화 추락에도 일본에서 외환위기나 금융위기를 걱정하는 분위기는 찾기 힘들다. 일부에서 ‘일본발(發) 아시아 외환위기’ 가능성이 거론되지만, 국제 금융가에서는 일본보다 한국을 더 걱정하는 판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필리핀 페소화와 함께 한국 원화가 아시아 통화 중 가장 취약하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경기 둔화를 겪고 있는 중국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높고, 북한 미사일 도발 등 지정학적 리스크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턱밑까지 쫓아온 대만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한국이 일본을 쫓는 사이 뒤에서 더 빠른 속도로 한국을 따라잡는 상대가 있다. 대만이다. IMF가 추정한 올해 대만의 1인당 GDP는 3만5513달러. 한국보다 2000달러 가까이나 많다. 한국보다 성장률이 높고 환율도 안정됐기 때문이다.

IMF는 올해와 내년 대만 성장률을 3.3%와 2.8%로 예측했다. 한국 예측치 2.6%와 2%보다 높다. 코로나 19가 한창이었던 2020년과 21년에도 대만은 3.4%와 6.6%라는 탄탄한 성장세를 기록한 바 있다. (한국은 -0.7%와 4.1%) 대만달러는 올해 들어 15% 정도 떨어지는 데 그쳐 한국(20% 하락)보다 하락률이 낮았다.

대만은 1980~90년대만 하더라도 1인당 GDP가 한국보다 높았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한국의 IT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2003년 한국에 추월당했다. 그런 상황이 19년 만에 다시 바뀌는 것이다.

대만의 성장을 견인한 것은 비약적 발전을 한 반도체 산업이다. 대만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패키징, 테스팅 등 반제품 생산은 세계 1위다. 세계 파운드리 시장점유율(매출액 기준)은 올해 66%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 삼성전자는 대만 대표기업 TSMC에 시가총액 1위 자리를 내줬고, 올 3분기에는 반도체업계 매출 1위 자리마저 빼앗겼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 따르면 시가총액 상위 100대 반도체 기업 안에 한국은 3곳인 데 비해 대만은 10곳이나 된다.

환골탈태 대만, 과거 안주 일본

대만은 한국처럼 수출 주도형 경제 발전 전략을 취했지만, 주력은 달랐다. 한국은 대기업을 키웠고, 대만은 중소기업 위주였다. 그 결과는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확연히 갈라졌다.

대만 경제는 중국의 하청 기지로 전락하면서 자생력을 잃어버렸다. 물가가 낮고 경제 불평등이 낮은 장점이 있었지만, 중국의 블랙홀에 빠져 버린 것이다. 기업·돈·인력이 대륙으로 유출되면서 대만 젊은이들은 한때 대만을 ‘귀신섬(鬼島)’이라고 자조할 정도였다. 전자·자동차·철강·유화 등에서 세계적 기업을 탄생시킨 한국을 지켜봐야 하는 처지에 빠졌다. 한국에서는 힐난의 대상이 된 ‘재벌’이 대만에서는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이런 딜레마에서 탈피하기 위한 승부수가 반도체 집중 육성이었다. 차이잉원 정부는 “기술이 최고의 안보”라는 기치 아래 반도체 산업 육성에 사활을 걸고 있다. 기업 민원에 따라 대학 반도체학과 정원을 대폭 늘리고 1년에 두 번 신입생을 뽑도록 할 정도다. TSMC·미디어텍·UMC·폭스콘·HTC 등 반도체·IT 기업의 성장은 이런 노력의 결실이다. 현재 반도체는 대만 수출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 체질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면서 한국을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반면 세계 경제를 주름잡던 일본은 변화를 외면하며 정체에 빠졌다. 1990년대 부동산값 폭락 이후 디플레이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잃어버린 30년’을 겪었다.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인위적 환율 상승을 용인하면서 내수 부양으로 정책 기조를 틀었으나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과 중국에 중간재 산업을 뺏기고 말았다. 소재·부품·장비 등 제조업 신화에 도취해 디지털 및 글로벌 흐름을 도외시한 채 ‘갈라파고스의 섬’에 안주한 결과다. 저출산과 고령화도 경제 활력을 잠식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엔화 가치가 버블 붕괴 후 최저 수준이 된 것은 일본 정부가 구조적 경제 문제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이 누적된 결과”라고 지적했다. 과거의 성공 방정식을 버리고 환골탈태 발전 전략을 채택한 대만과 대비된다.

방심하다간 일본 전철 밟는다

일본의 펀드멘털은 여전히 신뢰를 받고 있지만, 과거보다 취약해졌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GDP 대비 263%에 달하는 국가부채는 심각하다. 일본이 엔저를 사실상 수수방관하며 초저금리를 유지하는 것도 막대한 국가부채로 인해 금리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이다. 금리를 올리면 국채의 절반을 쥐고 있는 일본은행의 보유 자산 가치가 떨어져 금융의 최후 보루가 무너진다. 정부의 이자 부담도 급속히 커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일본의 경제 규모는 여전히 한국의 3배 수준이다. 좁혀지긴 했지만 격차는 여전하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三代)는 간다고 했다. 일본은 무역수지에서 적자가 나도 막대한 소득수지로 상쇄해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는 구조다. 국제에너지 가격 급등 등으로 무역 적자가 계속될 경우 경상 적자를 걱정해야 하는 우리와는 처지가 다르다.

한국이 몇몇 경제 지표에서 일본을 추월한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일본 경제가 급속하게 쪼그라든다면 한국에도 이로울 건 없다. 한·일 간 경제는 경쟁적이기도 하지만 상보적이기도 하다. 상호의존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한국 경제는 고비 때마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자기 혁신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1990년대 말 외환 위기는 경제 체질 변화의 계기가 됐다. 산업화는 일본에 뒤졌지만, 정보화는 앞섰다. 그런 과정을 거쳐 한국은 가까스로 경제·군사·문화 등에서 과거 식민지배국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일본에 견준 한국의 약진에 뿌듯해하는 건 좋지만 방심할 때가 아니다. 일본 경제의 전철(前轍)을 경계하며 내실을 다져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