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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김현종이 들고온 한·미 FTA 결렬안...盧 앞에서 벌컥 화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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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진영을 넘어 미래를 그리다 〈4〉 긴박했던 한미 FTA 협상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2007년 3월 말이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때문이었다. 협상 마감시한이 코앞이었다. 마지막 협상장은 서울 남산 하얏트호텔이었다. 우리 대표단은 미국 측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호텔 바깥엔 협상 반대 시위대가 몰렸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청와대로 들어왔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최종 협상 경과를 보고했다. 청와대 정책실장이던 나도 배석했다. 보고 내용을 살펴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황당했다. 김 본부장이 가져온 안에는 ‘협상 결렬’이 들어 있었다. 협상을 더 해보다가 정 안 되면 우리 쪽에서 결렬을 선언하자는 식이었다. 시중에 떠도는 음모론과 사실상 같은 맥락이었다.

나는 벌컥 화를 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 부분은 빼라고 했는데 왜 그대로 가져왔습니까. 우리가 진정성도 없이 정략적으로 했다는 겁니까.” 협상하다 보면 상대를 압박하기 위해 결렬 가능성을 내비칠 수도 있다. 그건 협상 전술일 뿐이다. 그런데 김 본부장의 안은 전술적 얘기가 아니었다. 실제로 협상을 결렬시킬 수도 있다는 거였다. 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현종, 노 대통령에 결렬안 보고
“있을 수 없는 일” 화내며 막아내
한덕수가 전한 미국의 최종 요구
대통령에 묻지도 않고 거부 통보

2007년 4월 2일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오른쪽)과 캐런 바티야 미 무역대표부 부대표가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한미 FTA 협상 타결 기자회견에서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7년 4월 2일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오른쪽)과 캐런 바티야 미 무역대표부 부대표가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한미 FTA 협상 타결 기자회견에서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대통령 앞에서 이렇게 흥분하기는 처음이었다. 담당 장관이 대통령에 보고할 때 정책실장이 끼어드는 건 삼가왔다. 대통령을 모시는 참모로서 나름의 원칙이었다. 이날은 예외였다.

통상 정책실장은 사전에 대통령 보고 내용을 전달받는다. 정식 보고 전에 정책실장을 거쳐서 가져오라는 건 노 대통령 지시였다. 엉뚱한 보고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는 뜻도 있었다. 대통령 보고에 앞서 전 김 본부장이 가져온 자료에도 ‘협상 결렬’ 안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크게 화를 냈다. “협상을 어떻게든 성공시킬 생각을 해야지 이게 무슨 전략입니까. 이건 대통령 뜻에 맞지 않으니 반드시 빼세요.” 그런데도 김 본부장은 대통령 보고에 같은 걸 다시 들고 왔다.

“결렬되면 나 포함 네 명을 자르시라”

당시 시중엔 이런 말이 돌았다. 노무현 정부가 한미 FTA 협상 마지막 순간에 판을 깬다. 미국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한다. 모든 책임은 미국에 돌리고 협상 결렬을 선언한다. 지지 세력엔 엄청난 인기를 끌 거고 일반 국민에게도 배짱이 대단한 사람으로 보일 거다. 그러면 지지율이 쑥 올라가 정치 판세를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시중 루머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노 대통령은 그런 졸렬한 수를 쓰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노 대통령에겐 한미 FTA가 궁극적으로 우리 경제에 이익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인류 역사를 보면 개방하지 않는 나라는 다 망했다. 물론 개방한다고 반드시 성공한다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나라가 망하는 길로 갈 수는 없다. 이게 노 대통령의 확고한 역사관이었다. 노 대통령은 또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차이도 말했다. 강대국의 속성은 비슷하다. 다만 역사적으로 보면 대륙세력이 남의 나라를 지배하는 방식이 더욱 혹독했다고 했다.

그래도 굴욕적인 협상 타결은 안 된다. 협상이 깨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우리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걸 미국이 끝까지 고집한다면 말이다. 음모론자들은 당장 “그러면 그렇지”라며 박장대소할 게 뻔했다. 꼭 음모론은 아니더라도 협상 결렬의 대비책이 있어야 했다.

같은 해 3월 30일 한미 FTA 협상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시도하며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모습. 중앙포토

같은 해 3월 30일 한미 FTA 협상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시도하며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모습. 중앙포토

나는 노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협상이 결렬되면 즉각 네 명을 해임하십시오. 자진 사표가 아니라 결렬 책임을 물어 해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음모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네 명은 정책실장인 나, 권오규 경제부총리, 박홍수 농림부 장관,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다. 경제부총리는 한미 FTA를 총지휘하고 주도한 자리였다. 한덕수 경제부총리 시절에 한미 FTA의 시동을 걸었고 권 부총리가 이어받았다. 만일 협상이 결렬됐다면 농업 분야에서 우리가 끝까지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러니 농림부 장관에게도 책임을 물으라고 했다.

미국 “이것 3개만 들어주면 타결”

협상 타결 전날인 2007년 4월 1일의 일이다. 초조한 마음으로 협상 결과를 기다렸다. 밤이 깊어 갔다. 노 대통령에겐 먼저 주무시라고 하고 나는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오후 10시쯤인가, 11시쯤인가 생각한다. 한 총리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왔다. “백악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최종 조건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이것만 우리가 받으면 즉각 협상을 타결하겠다는 겁니다.”

노 대통령이 한 총리를 발탁한 이유 중 하나가 한미 FTA 협상이었다.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 초대 통상교섭본부장을 맡았다. 노무현 정부에선 총리실 국무조정실장(장관급)과 경제부총리를 거쳐 한미 FTA 체결지원위원장 겸 대통령 특보를 지냈다. 한 총리는 미국의 진짜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통로 역할도 했다. 그날 미국이 제시한 세 가지가 뭐였는지는 자세히 기억이 안 난다. 소고기는 아니었고 자동차 관련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노 대통령과는 이미 얘기가 다 돼 있던 내용이었다. 설사 협상이 결렬되더라도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곧바로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심사숙고하는 것처럼 보여야 했다. 1시간쯤을 흘려보냈다. 한 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께서 안 된다고 합니다.” 사실 노 대통령에겐 물어보지도 않았다. 굳이 밤늦게 노 대통령을 깨울 필요도 없는 사안이었다.

부시 속사정 읽고 유리하게 매듭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 소식을 전한 중앙일보 2007년 4월 3일자 1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 소식을 전한 중앙일보 2007년 4월 3일자 1면.

나는 속으로 자신이 있었다. 정작 급한 건 우리가 아니라 미국이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그 전까지 내세울 만한 업적이 별로 없었다. 국내 정치는 엉망이고 대외 정책에서도 비난을 많이 받았다. 한국 정도 되는 큰 나라와 FTA는 하나도 못했다.

부시로선 한미 FTA가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2007년 상반기는 부시에게 중요한 고비였다. 미국 의회가 대통령에게 부여한 무역협상촉진권한(TPA)의 종료 시한이었다. 이때까지 협상을 타결하지 못하면 사실상 빈손으로 임기를 마쳐야 했다. 그러니 한미 FTA 타결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고 봤다. 노 대통령도 나와 같은 판단이었다.

결국 포기한 건 미국이었다. 4월 2일 새벽 1~2시에 연락이 왔다. 협상 타결 소식이었다. 미국으로선 대단한 양보를 한 셈이었다. 뒤집어 보면 우리에겐 무척 유리한 결과였다. 당시엔 이런 점을 공개 자랑할 수 없었다. 협상은 상대가 있다. 우리가 많이 가져왔다는 건 거꾸로 상대가 많이 양보했다는 뜻이다.

짐작건대 미국 협상 실무자들은 커다란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한국에 이렇게까지 양보해야 하나. 이게 다 부시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예컨대 픽업트럭 같은 건 미국이 절대 양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봤던 부분까지 양보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후 미국은 새 대통령이 취임할 때마다 한미 FTA 재협상을 요구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그랬다.

한미 FTA는 미국과의 협상 타결로 끝이 아니었다. 산을 하나 넘으니 또 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회 비준이다. 그러자면 국내 반대세력을 설득해야 했다. 그들이 대개 노 대통령의 지지세력이란 점이 문제였다. 정치적 부담이 컸다. 노 대통령 임기 안에 국회 비준을 마무리하려면 큰 희생을 각오해야 했다. 지지 세력의 지지를 잃는 것이었다.

(※한미 FTA 음모론에 대한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의 설명은 크게 다르다. 그는 『김현종, 한미 FTA를 말하다』에서 “(음모론에 대해) 노 대통령은 어떻게 국가원수가 그런 위험한 게임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깨기 위해 협상을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난센스인데, 이러한 음모론이 협상 기간 내내 회자됐다”고 썼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내가 고의적으로 한미 FTA를 깰 것 같으면 김현종 본부장이 가만있겠나’라는 말까지 하면서 한미 FTA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표명했다”고 덧붙였다.)

정리·대담=주정완 논설위원, 이정재 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