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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혜정이 고발한다

전교조와 협약 탓에 못한다? 기초학력 평가 막는건 위헌이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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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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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경민 기자

그래픽=박경민 기자

정부가 최근에 기초학력 보장 종합계획(2023~2027년)을 발표했다. 여기엔 기초학력 평가가 포함돼 있는데, 이를 놓고 '진단평가에 따른 학력 증진은 학생의 기본권'이라며 반기는 입장과 '전수 평가는 서열화와 낙인 찍기 부작용이 심했던 과거 일제고사의 부활'이라고 반발하는 입장이 팽팽히 맞선다. 반대론자들은 평가 결과가 본래 취지와 달리 학생 간, 학교 간, 지역 간 줄 세우기 용도로 쓰여질 것이고, 학교에서 부적절한 방법까지 동원한 과열 경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초학력 평가에 대한 찬성과 반대 중 어느 쪽이 진정으로 학생을 위한 것일까?

답을 찾기 전에 먼저 중·상위권 학생의 학력 수준을 변별하기 위한 평가와 하위권을 끌어 올리려는 기초학력 진단평가의 차이를 알 필요가 있다. 기초학력은 전 세계 어느 교육과정에서도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해당 학년의 문해력과 수리력을 판단하는 것이라 전수 조사가 기본이다. 해당 집단의 평균 파악이 아닌 개별 학생에 대한 진단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전수 평가를 하던 시기에는 기초학력 미달률이 2.6%(2012), 3.4%(2013), 3.9%(2014), 3.9%(2015), 4.1%(2016)였는데, 2017년 표집(일부만 참여) 평가 이후 수치가 급증해 2021년은 과목별, 학년별로 6~14.2%에 이르렀다. 환자에게 최적의 처방을 하려면 각 환자를 정확하게 진단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학생의 학습 결손을 보완하려면 각 학생의 학력을 개별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모든 평가를 주입식 교육의 폐단처럼 말하는데, 상위권 변별 평가와 기초학력 진단평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창의 교육에서도 기초학력은 필요하다. 기초학력 진단조차 막는 것은 위헌적 행위다. 그런데도 일부 시·도 교육청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과 맺은 협약 탓에 진단평가조차 전수로 제대로 하지 못한다. 전교조와의 협약에 따르면 학교별 중간·기말고사는 폐지하고, 교육청 주관 학력고사를 금지하며, 평가 결과를 학교 간 비교 자료로 활용하지 못한다고 한다. 하나하나가 전부 학생들의 교육 기본권을 제한하는 행위다. 헌법 31조 1항에 의하면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특정 시·도나 특정 학교만 기초학력 진단 전수 평가에서 배제한다는 건 결국 다른 시·도, 혹은 다른 학교 학생과 다르게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난 21일 전교조 강원지부 조합원 등이 정부와 강원도교육청의 학력 진단평가 실시 방침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뉴시스

지난 21일 전교조 강원지부 조합원 등이 정부와 강원도교육청의 학력 진단평가 실시 방침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뉴시스

무엇보다 공교육에서 평가(시험)를 줄이면 양극화가 심화한다. 학교에서 시험을 안 보면 학생들은 사교육으로 몰려가 진단평가를 받는다. 학원에 가면 가장 먼저 받는 게 '레벨 테스트'다. 사교육에서는 수시로 진단평가를 하고 그에 맞는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런 상황에서 공교육이 시험을 포기하면 학원에 가서 자주 진단받고 그 결과에 따라 필요한 학습 결손을 보완할 여력이 되는 집단과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 집단 간 격차가 벌어진다. 학습 결손은 누적될수록 점점 더 회복이 어렵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간격이 커진다. 경제력 차이가 결국 학력 격차로 귀결되는 셈이다.

학력 저하가 심각해졌다는 경고는 객관적 지표와 현실 체감, 양쪽에서 모두 나타난다. PISA(국제학업성취도평가) 지표를 보면, 기초학력 미달률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큰 변화가 없는데 한국만 두 배 가까이로 증가(2012년 8%에서 2018년 15%)했다. 국내의 국가수준학업성취도 평가에서도 고2 기초학력 미달률이 2016년 3~5%에서 2021년 7.1~14.2%까지 급증했다. 이러한 지표상 위기가 코로나19 사태로 더 극명하게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모두 문제를 체감하게 됐다.

'코로나 여파로 성적 중위권 실종'이라는 식의 뉴스가 빈번하게 나왔는데, 사실 교실 수업이 줄어서 하위권이 늘어났다는 소식보다 더 실망스러운 점은 상위권이 늘었다는 것이다. 혼자 공부를 했든 사교육 도움을 받았든, 학교 수업이 줄자 중위권 상당수가 상위권으로 올라갔다는 건 '학교는 필요 없다'는 식의 공교육에 대한 회의감을 증폭시킨다. 이번 교육감 선거에서 후보들이 앞다퉈 학력 제고를 공약한 것도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진단평가의 본질적 목적이 기초학력 미달 해소라면 꼭 같은 학년의 전국 모든 학생이 한날한시에 같은 문제지로 시험을 보는 일제고사 형태로 평가할 필요가 없다. AI(인공지능) 기반 평가 체제에서는 수시, 상시 평가가 큰 번거로움 없이 가능하다. 부작용을 줄이는 세심한 실행 전략만 짜면 된다.

기초학력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이 성공하려면 진단이 정확성뿐 아니라 보정의 정교성도 갖춰야 한다. AI 체제에서는 수많은 학생의 학습 경로 빅데이터를 분석해 정확한 진단을 하고 학습 결손을 보완할 정교한 피드백도 제공할 수 있다. 학습 결손은 학습 시간 자체가 부족해서일 수도 있지만 때론 동기유발이 안 돼서, 혹은 하려는 의욕 자체가 없어서이기도 하다. 또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정부가 2025년까지 'AI 기반 학습진단체계'와 '국가 기초학력 지원 포털'을 구축한다고 한다. 학습 결손이 발생하는 인지적·사회적·정서적 원인까지 정확히 진단하고 정교한 피드백을 제공할 수 있는 종합적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학교와 교사가 개별 학생 피드백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업무 구조를 혁신할 필요도 있다. 학력 제고에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개별 학생에게 직접 피드백을 주는 것이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인용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런 피드백은 학력 증진 효과 측면에서 학생 수를 교실당 20명 미만으로 줄이는 것의 세 배, 학교 시설 개선의 아홉 배에 이르는 효과가 있다. 개별 학생 피드백을 늘릴 수 있도록 교사들이 맡는 행정 잡무를 파격적으로 줄이는 행정 혁신을 기대한다. 교육부와 각 시·도 교육청이 학교에 온갖 자료를 요구하고, 교사들이 이에 맞추느라 시간을 보내는 후진적 행정에서 과감히 벗어날 때가 이미 지났다.

장상윤 교육부 차관이 지난 11일 기초학력 보장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장상윤 교육부 차관이 지난 11일 기초학력 보장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이번 교육부 발표에 의하면 '맞춤형 학업성취도 자율평가'를 통해 1수준 판정을 받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초학력 진단 검사’를 통한 정밀 진단을 실시하여 보정 지원하는 시스템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현 국가수준학업성취도 평가는 학생의 학력을 1부터 4까지 네 개 수준으로 나누게 돼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가장 낮은 1수준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은 기초학력을 보장하는 공교육의 책무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저 상위권인 4수준을 늘리는 것이 절대적인 목표가 되어서도 안 된다. 지금까지의 학업성취도 평가 문제지를 보면 4수준 학생들이라도 4차 산업혁명 시대가 필요로 하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상위권 변별을 위해 정해진 지식을 얼마나 머리에 잘 넣었으냐, 얼마나 빨리 문제를 푸느냐를 측정하는 현재의 평가 패러다임은 새 시대에 맞지 않다. 이제 교육계는 이를 고민해야 한다. 수능도 마찬가지다. 궁극적으로 어떤 역량을 기를 것인지, 어떤 능력을 평가할 것인지를 놓고 치열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