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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만 다녔는데 빚 1200만원... 경마장을 다닌 것도 아닌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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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지방 대학교 학생 정용과 진만을 5년 내내 붙잡고 글을 쓴 이기호는 "처음엔 유쾌하게 쓰려고 했는데, 현실이 점점 더 어려워지다보니 소설 속 인물들도 점점 힘들어질수밖에 없었다"며 "다 쓰고 나서도 주인공들이 신경쓰여서 이렇게 찜찜함이 남는 작품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권혁재 기자

20대, 지방 대학교 학생 정용과 진만을 5년 내내 붙잡고 글을 쓴 이기호는 "처음엔 유쾌하게 쓰려고 했는데, 현실이 점점 더 어려워지다보니 소설 속 인물들도 점점 힘들어질수밖에 없었다"며 "다 쓰고 나서도 주인공들이 신경쓰여서 이렇게 찜찜함이 남는 작품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권혁재 기자

“원래 소설을 끝내면 끝냈다 하는 홀가분함이 있는데, 이번엔 친한 친구들을 힘든 곳에 내팽개치고 혼자 빠져나온 것 같아 미안한 기분이 들어요.”

20대 청년 그린 『눈감지 마라』 낸 이기호 #"유쾌하게 시작, 5년 쓰며 슬퍼졌다"

'부장급 작가' 이기호(50)는 소설집 『눈감지 마라』(마음산책) 출간 소감을 묻자 대뜸 이렇게 답했다. 소설책을 또 한 권 냈다는 성취감보다 그 안에 그려 놓은 청년들에 대한 안쓰러움이 그만큼 큰 듯했다.

이기호 작가는 몇 해 전부터 '최소한으로 분량을 줄인' 소설들로 사랑받아 왔다. 200자 원고지 15쪽 분량. 보통 단편소설의 5분의 1 길이다. 인물도 사건도 휙휙 바뀐다. 이번 소설집도 짧은 소설집이다. 그런데 코로나 시기 남들보다 더 큰 고통을 겪은 20대 지방 청년들의 딱한 사정을 파고들었다.

“쓰고 나도 찜찜… 희망적일 줄 알았는데 패배”

"그냥 조용히 대학만 다녔을 뿐인데도 정용은 800만원, 진만은 1200만원 빚이 생겼다. 아니, 우리가 무슨 경마장을 다닌 것도 아니고… '3번마'에게는 건초라도 공짜로 주기나 했지, 나는 누가 등 한 번 두들겨준 적 없는데…." 

소설집에 실린 작품 '이사'의 한 대목이다. 대학을 졸업했건만 취업은 어렵고, 학자금 대출만 떠안은 처지가 안타깝다.

 "전염병의 나날. 고용주들도 힘들긴 마찬가지였지만, 아르바이트생들의 고통은 더 분절된 형태로 오는 것 같았다. 고통도 시급으로 왔다."  

또 다른 단편 '눈감지 마라'의 일부다. 흔한 편의점·배달 알바도 지방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자리다. 고통이 시급으로 온다는 얼핏 평범한 구절이 가슴을 할퀸다. 턱도 없는 시급을 받는 알바생에게 알바 시간은 그 자체가 고통이다.

소설집은 지방에서 태어나 지방 사립대를 졸업한 20대 청년 정용과 진만이 주인공인 연작 형태다. 이들은 돈을 아끼기 위해 보증금 없는 월세 30만 원짜리 변두리 방에서 함께 산다. 출장뷔페·고속도로 휴게소·택배 상하차·유품정리업체 등 아르바이트란 아르바이트는 닥치는 대로 손대지만, 형편이 나아질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소설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남들은 몇억 원씩 되는 아파트를 영혼까지 끌어 마련한다고 하는데 (…) 그렇다면 진만의 영혼은 과연 어떤 영혼인가? 무슨 다이소 같은 영혼인가? 다이소에서 파는 5000원짜리 지갑에 깃든 영혼인가?" ('영혼까지 끌어 쓴다는 일') 

두 사람이 편의점에 접근한 멧돼지를 보고 놀라 도망치는 장면은 이번 소설집의 몇 안 되는 웃긴 에피소드 중 하나다. 하지만 소설은 비참하고 갑갑한 둘의 모습을 드러내며 차츰 어두워진다. '유쾌함'이 지배적이었던 그간의 이기호 소설과는 분위기가 딴판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눈감지 마라'는 "외면하지 말고, 죽지 말자는 두 가지 메시지" 

15년째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기호는 스스로를 '교수'가 아닌 '선생'이라고 불렀다. "어차피 졸업하면 같이 글을 쓰는 동료"라며 '교수' 직함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는 "소설집을 낼 때보다 3월 개강 때 1학년 강의실을 들어가는 기분이 더 설렌다"고 할 정도로 가르치는 일에 애정을 보였다.. 권혁재 기자

15년째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기호는 스스로를 '교수'가 아닌 '선생'이라고 불렀다. "어차피 졸업하면 같이 글을 쓰는 동료"라며 '교수' 직함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는 "소설집을 낼 때보다 3월 개강 때 1학년 강의실을 들어가는 기분이 더 설렌다"고 할 정도로 가르치는 일에 애정을 보였다.. 권혁재 기자

이기호는 “쓰고 나서 계속 마음이 무겁고 찜찜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2017년 촛불 정국 한가운데서 많은 것들이 희망적으로 변할 거란 기대감 속에 유쾌하게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어수룩한 주인공들이 성장해나가는 이야기가 될 줄 알았는데, 결국 성장보다는 더 많이 패배하고, 차별과 배제를 피할 길 없는 지방 청년들의 이야기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소설집 제목 '눈감지 마라'는 그런 청년 세대를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내면을 반영한 것이다. 표제작 '눈감지 마라'는 편의점 안에서 벌어진 불법촬영 사건이 소재다. 이기호는 제목의 '눈감지'에서 '눈'과 '감지' 사이를 붙여 쓸 수도, 띄어 쓸 수도 있다고 했다. 붙여 쓰면 (눈감지 마라) 타인의 고통, 가해자의 악행에 눈감지 말자는 뜻이다. 기성세대가 이 친구들의 모습을 외면하지 말자는 거다. 띄어 쓰면(눈 감지 마라) 소설 속 아니, 이 시대 어려운 청년들이 눈 감지, 죽지 말라는 의미다.

20대 이야기, 학생들 반응은? "안 물어봤다, 도망다녀"

1999년 데뷔해 어느덧 작가 24년차. 이기호가 스스로를 부장급 작가라 칭하는 이유는 단순히 연치(年齒)를 먹었기 때문이 아니다. 지난 2년 간 그는 소설 외적인 일로 사람들 입길에 오르내렸다. 이상문학상 공정성 시비에 목소리를 높였고, 문단 최고 원로들의 모임인 예술원 개혁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부장급'은 그래서 스스로 붙인 칭호다.
"부장이 자기 승진을 위해 눈치 보기 시작하면 모순은 이어질 수밖에 없지 않나. 회사를 나간다는 각오로 꺼낸 이야기들"이라는 것이다. "원래는 두려워서 많이 참고, 눈치도 많이 보는데, 이제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저지른 일이라고 했다.
그는 또 "문학판 안의 모순과 문제점에 눈감으면서 사회의 모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위선적이라 생각했다"며 "문학계의 주축이 빠르게 젊어지고 있고, 나도 주축이 아니라 곧 교체될 세대에 가깝다. 내 글 쓰느라 바빴으면 오히려 그런 말들을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24년차 '부장급' 작가, "회사 나간다는 각오로" 던진 말

이기호는 "저는 이제 교체될 세대에 가깝죠, 오히려 주축에서 멀어졌고 제 글 쓰느라 덜 바빠서 문학계 일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신인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글 쓸 수 있게 길을 내주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만, 지금 신인들이 제가 신인때보다 더 힘든 환경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권혁재 기자

이기호는 "저는 이제 교체될 세대에 가깝죠, 오히려 주축에서 멀어졌고 제 글 쓰느라 덜 바빠서 문학계 일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신인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글 쓸 수 있게 길을 내주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만, 지금 신인들이 제가 신인때보다 더 힘든 환경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권혁재 기자

이런 부장급 마인드와 그가 몰아세운 '어르신들'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얼마나 될까. 이기호는 50대 작가가 20대 청년들의 세계를 그리면서 "난 너희들을 잘 알아 하는 꼰대 마인드가 나올까 봐 특히 조심했다”고 했다.
"20대 생각을 만족스럽게 그린 것 같지는 않다. 부끄러워 내 글을 다시 보지 않는다"며 "기성세대가 청년 이야기를 쓰는 게 오만한 일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걸 넘어서는 게 작가라고 생각했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제자들이 이번 소설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냐고 묻자 그는 “안 물어봤다, 난 내 소설 얘기 나올라치면 도망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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