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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째 '제왕의 스승'…시진핑의 중국몽 만든 현대판 제갈량 [후후월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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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시진핑 3기 정치국 상무위원 6인 분석 ③ 왕후닝 

인도 시사주간지 더위크의 지난 2021년 12월호 표지.

인도 시사주간지 더위크의 지난 2021년 12월호 표지.

“시진핑 주석이 무관의 왕이라면, 왕후닝은 중국 크렘린의 추기경이다.” (인도 시사 주간지 더위크, 2021년 12월)

“왕후닝은 많은 이들이 거의 들어본 적 없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다.” (워싱턴포스트, 2021년 12월)

지난 23일 20대 신임 중앙정치국상무위원의 내외신 기자 상견례 장의 왕후닝. 신경진 특파원

지난 23일 20대 신임 중앙정치국상무위원의 내외신 기자 상견례 장의 왕후닝. 신경진 특파원

지난해 말 한 명의 중국공산당(중공) 이론가를 우려하는 글이 서구 유력지에 쏟아졌다. 주인공은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시진핑(習近平)에 걸쳐 3대째 ‘제왕의 스승’으로 불리는 중공 최고 이론가 왕후닝(王滬寧·67)이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에 이어 시진핑이 세 번째 역사결의를 통과시킬 무렵 그는 서구의 공공의 적으로 떠올랐다. 왕후닝은 중국에서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이론가 천보다(陳伯達, 1904~1989), 캉성(康生, 1898~1975) 이후 중공 최고 권좌인 정치국 상무위원 직을 두 번째 차지한 이데올로그여서다. 일각에서는 독일의 괴벨스에 비유한다.

천생 책벌레인 왕은 1955년 10월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중학 시절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문혁)을 맞닥뜨렸다. 1972년 여름 단기간의 학도공을 지낸 후 ‘공농병’ 자격으로 상하이사범대학 외국어반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1977년 졸업 후 상하이 신문출판국에 배치받아 1년간 근무했다.

상하이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과 사무실 벽에 붙어 있는 역대 졸업사진. 앞줄 오른쪽 다섯번째가 왕후닝 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상무위원. 신경진 특파원

상하이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과 사무실 벽에 붙어 있는 역대 졸업사진. 앞줄 오른쪽 다섯번째가 왕후닝 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상무위원. 신경진 특파원

1978년 대학 입학시험이 부활했다.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한 왕은 푸단(復旦)대 국제정치학과 국제정치전공 연구생(석사)에 합격했다. 17년간 이어질 푸단 생활의 시작이다. 마르크스 『자본론』의 권위자인 스승 천치런(陳其人)을 만난 그는 28세에 푸단대 정치학과 부교수, 33세에 정교수가 됐다. 38세에 과 주임교수가 되어 전국 스타 교수로 이름을 날렸다. 서구의 최신 학술 사조 및 저서를 번역 소개하고 푸단대팀을 이끌고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 대학생 토론대회에 참가해 1위를 거머쥐는 등 활약을 이어갔다.

5년 전 기자는 19차 당 대회에서 왕후닝이 상무위원에 선출된 직후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과사무실을 찾았다. 1980년대 교수 왕후닝이 졸업생들과 찍은 사진이 보였다. 캠퍼스 인근 중고서점을 찾았다.

왕후닝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상무위원의 1989년 편저 『부패와 반부패』 서론. 8번째 줄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체포를 언급했다. 신경진 특파원

왕후닝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상무위원의 1989년 편저 『부패와 반부패』 서론. 8번째 줄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체포를 언급했다. 신경진 특파원

서점 주인은 중국 실세가 된 왕의 저서에 웃돈을 요구했다. 세계 반(反)부패 활동을 담은 편저서 『부패와 반부패』에서 “한국 전 대통령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100억원 수뢰로 체포 기소됐다”고 적은 문장을 발견했다. 1994년 한해 동안 그의 일기를 담은 저서 『정치적 인생』은 이미 온라인 중고서점에서 자취를 감췄다. 소유자들이 매물을 다 거둬들여서다. 책 수집가들에게 왕후닝의 책은 이미 가격을 매길 수 없는 희귀서가 됐다.

왕은 마흔이던 1995년 당무를 주관하는 중앙판공청의 쩡칭홍(曾慶紅) 주임의 추천으로 장쩌민의 책사로 선발됐다. 베이징에 올라온 그는 그 해 열린 중공 14기 5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5중전회)에서 개혁과 발전, 안정의 삼각관계를 탄탄한 이론틀로 풀어낸다. ‘국가주석 특별보조(助理)’로 중앙정책연구실을 차지한 왕은 장쩌민의 지도 사상인 삼개대표론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중공을 노동자와 농민뿐만 아니라 자본가까지 포괄하는 당으로 변모시켰다. 2002년 후진타오(胡錦濤)가 당 총서기에 오를 때 왕후닝도 200여명에 불과한 중앙위원회 진출에 성공하며 중공 권력의 피라미드 첨탑으로 진입했다. 후진타오 2기가 시작된 2007년 17차 당 대회에서는 중앙서기처에 들어가 그의 최측근이 되어 개혁개방 이후 중국이 고심하던 고속 성장의 후유증을 치료하는 처방인 ‘과학발전관’을 입안해 후진타오에게 헌납한다.

시진핑 시대가 시작된 2012년 18차 당 대회에서 왕은 권력서열 25위의 정치국 진입에 성공한다.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이 정치국에 진입하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이때부터 왕은 세 명의 지도자를 보좌한 ‘살아있는 제갈량(諸葛亮)’으로 불린다. 삼국시대 유비를 도와 천하를 위·촉·오로 삼분하는 데 결정적 공울 세웠던 인물이다. 시진핑의 취임 일성인 ‘중국몽’을 만든 왕은 이때부터 이른바 ‘시진핑 사상’ 만들기에 돌입한다.

김일성 사망에 새로운 시기 예감

왕후닝은 1994년 7월 10일 자 일기에 이렇게 썼다. “북한 김일성 주석이 세상을 떴다. 새로운 시기의 시작을 의미할 수 있다. 그곳에서 최근 발생한 일련의 문제는 주로 국제사회와 두 개 한국 내부의 일이다. 이번 사건(김일성 사망)이 이들 문제의 발전에 어떤 충격을 줄 것인가 관찰이 필요하다.”

24년이 흐른 뒤인 2018년 이데올로기를 담당하는 중앙서기처 제1서기로 변신한 왕후닝은 북한 노동당 담당 업무를 겸임했다. 그해 세 차례 베이징을 방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베이징 역사로 나가 영접하는 등 모든 일정을 밀착 수행했다.

정치학자로 왕의 최대 연구 과제는 중국에서 또 다른 문혁 발생을 막는 일이었다. 그는 1986년 상하이에서 출판된 대표적인 개혁파 신문 ‘세계경제도보’에 기고문을 싣고 안정을 강조했다. “안정된 정치제도를 건립해야만 사회주의의 고도 민주를 실현할 수 있고, 그래야만 문혁의 비극이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혁의 재발을 막고자 했던 왕후닝은 아이러니하게 문혁을 주도했던 문혁소조 조장 겸 이론가 천보다에 비유된다.

중공은 22일 폐막한 20차 당 대회에서 ‘중국식 현대화’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서구식 현대화와 다른 ‘중국의 길’을 제시했다. 중공 최고 이론가로 ‘신권위주의’의 대부로 불리는 왕후닝은 이제 21세기 마르크스주의를 꿈꾼다. 아직 ‘사상’에 머무는 시진핑의 사회주의 이념을 ‘시진핑 주의’로 격상할 태세다. 왕후닝은 이번 20차 당 대회에서 퇴진이 예상됐다. 시진핑은 반대로 장쩌민의 상하이방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왕을 서열을 한 단계 올리면서 통일전선 업무를 총괄하는 전국정치협상회의 주석을 맡겼다. 자신의 사상을 한 단계 격상하려는 의도가 깔렸다는 해석이 나온다.

위아래 구분하기를 좋아하는 중국은 이념에도 위계(位階)를 만들었다. 가장 상부를 주의(主義)가 차지한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이념에 붙는다. 다음이 사상이다. 마오쩌둥이 독점했다. 5년 전 시진핑도 사상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론은 다음이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과 공산당 집권 이념이 이론에 해당한다. 이번 당 대회 업무보고 제2장의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마르크스주의 중국화·시대화의 새로운 경계를 열다’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를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에 머물렀던 마오쩌둥 사상을 넘어 시진핑 사상을 21세기 마르크스주의, 즉 ‘시진핑 주의’로 격상시키려는 움직임의 시작으로 해석했다. 이른바 북한 ‘김일성 주의’의 중국식 버전 만들기인 셈이다. 이 과정에서 왕후닝이 어떤 역할을 맡을지 주목된다.

지난 1989년 미셸 옥센버그 미시간대 교수가 왕후닝 당시 상하이 푸단대 교수에게 보낸 편지. 사진 선룽친(沈榮欽) 캐나다 요크대 교수 페이스북

지난 1989년 미셸 옥센버그 미시간대 교수가 왕후닝 당시 상하이 푸단대 교수에게 보낸 편지. 사진 선룽친(沈榮欽) 캐나다 요크대 교수 페이스북

왕, 천안문 사건 당시 중공의 약화 우려

지난 1989년 천안문 사건 당시 왕후닝은 중국의 민주화가 아닌 당의 권위가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 지난 24일 선룽친(沈榮欽) 캐나다 요크대 교수가 당시 왕후닝과 미셸 옥센버그 미국 미시간대 교수가 주고받은 편지의 일부를 공개했다. 왕후닝은 당시 개혁개방이 촉발한 중공 중앙의 권위 약화를 우려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미국 카터 행정부가 베이징과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하는 정책을 지지했던 옥센버그 교수는 왕후닝의 논문에 중국의 준(準) 연방제 국가로의 변화 가능성을 지적했다.

중국 개혁파 정치가 후야오방(胡耀邦)의 사망이 학생 시위를 촉발하자 왕후닝은 옥센버그 교수와 절박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스탈린주의의 낡은 시스템에서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전환은 역사적으로 선례가 없다. 전환은 좌절과 혼란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문제의 열쇠는 어떻게 혼란을 통제 가능할 정도로 줄이느냐에 있다. 연구에 큰 주제이지만 흥미롭고, 연구하고 싶은 주제다.” 왕후닝은 옥센버그 교수의 지적에 공감했다.

이론가 왕후닝은 20차 당 대회 보고를 통해 ‘중국식 현대화’를 제창했다. 옥센버그 교수의 질문에 30여년간 실무와 연구를 거듭한 왕후닝의 해답일 수 있다. 성공 여부는 이후 중국의 향후 모습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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