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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손학규 기고

안보·경제 복합위기, 박정희 리더십을 다시 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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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10·26 박정희 대통령 서거 43주기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1979년 10월 26일 오후 6시쯤, 경남 김해 보안대 취조실. “손학규, 너 여기 있었구나.”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함께 중앙정보부 대공수사단장 최모씨가 대여섯 명의 수사관들과 함께 들어온다. “아, 나는 죽었구나.” 순간적으로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그로부터 두어 시간 뒤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쓰러졌다.

그에 앞서 10월 18일 부산·마산 지역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확산하자 부산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기독교교회협의회(NCC) 간사였던 나는 10월 22일 암흑천지가 된 부산에 갔다. 부산에서 최성묵 목사 등 인권운동가들을 만나며 상황을 알아보다가 24일 경찰에 체포돼 김해 보안대로 이첩됐다.

보안대 취조실에서 접한 대통령 서거

김해 보안대에서는 아무런 취조도 없이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등과 엉덩이, 종아리 등을 하도 맞아서 누울 수도 없는 상태라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그때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 대공수사단장이 직접 내려온 것이었다. 48시간 동안 부하를 시켜 나를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두드려 패기만 했던 이유를 알 듯했다.

미증유 국가 위기 속에서도 우리 정치판은 진흙탕에 처박힌 꼴
미·중 기술패권 한창인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착공 계속 미뤄
박 대통령, 농업·공업·과학·국방 등 국가 전반의 발전 토대 닦아
세계변화와 국가미래 내다보며 나라 이끌었던 리더십 되새겨야

1966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종합 전시관 개관식에 참석해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박 대통령이 집권한 1960~70년대는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재건하기 위해 전방위로 경제개발에 매진한 시기였다. [중앙포토]

1966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종합 전시관 개관식에 참석해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박 대통령이 집권한 1960~70년대는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재건하기 위해 전방위로 경제개발에 매진한 시기였다. [중앙포토]

취조가 시작되고 두세 시간이 흘렀다. 밤 아홉시쯤 됐을까. 수사관들이 모두 나가고 취조실에는 나 혼자 남았다. 한 시간이 지났는데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두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차츰 겁이 났다. “얼마나 큰 음모를 꾸미기에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 것일까.”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저녁이 되니까 뭔가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괜찮으실 거예요.” 헌병의 말투부터 부드럽게 달라졌다. 또 날이 새고 28일 오후에 석방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그때야 알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우리가 이겼다”며 환호했다. 1965년 대학에 입학한 이래 1979년까지 오직 “독재 타도, 유신 철폐”만을 외쳐왔고, 1970년대에는 청계천 판잣집에서 연탄불에 라면 끓여 먹으며 빈민을 조직해 사회혁명을 하려던 청년에게 박정희의 죽음은 ‘승리’일 뿐이었다. 박정희가 안 죽었으면 손학규가 죽었거나 아니면 최소 사형선고는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위기 상황을 보면서 “만약 박정희가 지금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한반도에는 북한의 탄도 미사일이 하루가 멀다고 날아다니고, 항공모함·전략폭격기·핵잠수함 등 미군의 전략 자산이 한반도 상공과 주변 해역을 누비고 있다.

중앙정부의 역할 잘 보이지 않아

북한의 7차 핵실험이 예견되는 가운데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전술핵 재배치까지 논의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대만 무력 침공을 위협하고 있고,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전쟁에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전술핵 사용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고 한다. 이러다 정말로 한반도에 핵전쟁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두려움이 들 정도다.

문제는 군사적 위기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가파른 금리 인상으로 한국의 물가와 환율이 치솟았다. 무역 적자가 지속하고 경상수지 적자까지 심해지면서 위기 상황이 가중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취임 이후 미·중 대결이 반도체를 비롯한 경제 패권 경쟁으로 번지면서 한국경제가 자칫 희생양이 될 위험에 빠지고 있다. 바이든의 자국 산업 보호 정책으로 중국뿐 아니라 동맹국인 미국과 한국 사이에 일자리를 두고 제로섬 게임이 벌어지는 형국이다.

국내외적으로 가히 미증유의 안보위기에 경제위기까지 겹쳐있는데 정치 리더십은 진흙탕에 처박혀 있다.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미국과 일본은 세금 감면과 막대한 현금 지원을 통해서 기업을 유치하려고 정부가 나서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경기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지방자치단체의 이해관계에 얽혀서 3년이나 착공이 늦어지고 있다. 2026년 완공하려던 계획이 2027년에도 마무리되지 않을 형편인데 중앙 정부의 역할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박정희의 리더십을 말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나는 박정희의 정보정치·공포정치에 한이 맺혀 있는 사람이다. 선교 자금 사건으로 2년여 도피 생활을 할 때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기 직전에 병원에 잠입해서 뵌 일이 있었다. 1년 반 만에 나타난 막내아들을 보시고 첫 마디가 “네가 어떻게 여기 왔니. 빨리 가라. 너희 형들 다 망치게 하려고 하느냐”며 나를 내쫓으셨다. 쫓겨 나오면서 손주들 과자나 사주라고 3만원을 드렸다.

어머니는 “이게 무슨 돈이냐. 빨갱이 돈 아니냐” 물으시며 안 받으시려 하셨다. 그 돈은 바로 전날 어머니가 막내며느리인 내 아내에게 용돈으로 쓰라며 주신 돈 3만원 그대로였다. 어머니가 주신 돈을 그대로 어머니에게 다시 드렸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빨갱이 돈으로 의심하신 것이다.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박정희를 나는 결코 인정할 수가 없었다.

영국에서 바뀐 한국에 대한 인식

그런 내가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내가 외국으로 나간 것은 바깥세상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나가서 세계를 보게 됐고, 세계가 보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보게 된 것이다. 내가 그토록 미워했고 싸워 온 박정희에 대한 세계의 인식을 마주치게 된 것이다. 영국과 미국 등 세계는 박정희의 리더십에 의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나는 경기지사 시절 첨단산업의 발전이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핵심적 요소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외국의 첨단산업 유치에 총력을 기울였다. 파주에 LG-필립스S LCD 단지를 조성하고, 반도체·디스플레이·자동차부품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부품 산업을 거의 모두 유치했다. 판교 테크노밸리, 광교 나노팹 센터, 융합기술원, 평택항 개발 등은 첨단산업 발전을 위한 기반 시설을 만든다는 개념이었다. 이러한 첨단산업 유치 작업 과정에서 박정희가 과거에 구축해 놓은 경제의 기반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할 수 있었다.

박정희가 추진한 최초의 정책 목표는 민생고 해결이었다. 보릿고개를 없애기 위해 통일벼를 개발했고, 1976년에는 쌀의 완전 자급자족을 달성했다.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의 생활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홍수 방지와 수자원 확보를 위해 소양강 다목적 댐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댐을 건설했다.

네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서 공업 발전의 기틀을 만들었다. 섬유·가발 등 경공업에서 시작해서 철강·조선·자동차·석유화학 등 중화학공업을 발전시켰다. 수출액은 1964년 1억 달러에서 시작해 1971년 10억 달러, 1977년 100억 달러, 1979년 150억 달러로 급성장했다.

그는 기술 발전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를 설립해 외국에 있는 세계적 과학 기술자를 영입하고, 1968년 시작된 원전 건설 사업은 한국을 오늘날 세계 5위의 원전 수출국으로 이끌었다. 1970년 국방과학연구소(ADD) 설립은 대한민국을 세계 5위의 방산 국가로 키우는 시발점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세계 최빈국에서 중진국 수준으로 올려놓았을 뿐 아니라 선진국으로 갈 수 있는 과학기술 산업의 기반을 구축했다. 대만이나 싱가포르가 선진국 대열에 오르며 높은 국민소득을 구가하고 있지만, 철강·자동차·조선·석유화학공업이나 반도체·배터리·바이오 등 선진 경제가 갖춰야 할 중요 산업과 관련 인프라를 모두 갖춘 나라는 신흥 선진국 중 대한민국뿐이다.

박정희식 권위주의, 지금은 안 통해

반론도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의 경제 부흥은 총명하고 부지런한 국민의 덕이지 독재자 박정희의 공적이 아니라는 논리다. 박정희가 아니고 누가 대통령이 됐더라도 우리나라는 그만한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을 거라고 주장한다.

물론 우리나라는 총명하고 근면한 국민성, 잘살아 보겠다는 국민의 끈질긴 의지가 있었기에 빠른 경제 성장이 가능했다. 국민의 높은 교육열 또한 중요한 에너지다.  관료의 뛰어난 능력과 투철한 사명감은 국가 발전의 핵심적인 요소다. 우리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도 가히 세계적이고 역사적이다. 어떠한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화와 사회 정의를 실현해 온 근성 있는 민족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이뤄 놓은 경제 발전은 몇 개 부분의 한정된 경제구조가 아니다. 농업·경공업·중화학 공업을 순차적·체계적으로 발전시켰고, 미래 첨단산업을 위한 기반을 닦는 장기적이고 미래지향적 경제발전을 이뤘다.

오늘 우리나라가 처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길을 찾으며 박정희 대통령을 상기한다. 물론 박정희식 권위주의는 안 된다. 그러나 표만 쫓고 국민을 속이는 포퓰리즘은 절대 안 된다. 미래를 내다보는 지도자 없는 나라는 희망이 없다. 세계의 변화와 대한민국의 미래를 준비하며 나라를 경영한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을 평가한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