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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남한의 핵무장, 김정은의 노림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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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손기웅 전 통일연구원장

손기웅 전 통일연구원장

남한의 핵 무장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유도한다. 탄도미사일 불꽃을 연이어 튀기고, 지난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일을 전후해 전개한 유례없는 도발은 김 위원장의 교활한 꼬드김이다. 윤석열 정부는 말려들지 말고 냉철하게 대응해야 한다.

김 위원장이 상정하는 남쪽의 핵 무장은 전술핵무기의 주한 미군 재배치일 것이다. 자신의 도발에 반발해 남쪽이 핵 무장을 아우성쳐도 미국이 허용해줄 리가 없을 테고, 남한도 그럴 수 없는 국내외 환경에 놓여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하다.

북한의 잇단 도발 정확히 읽어야
전술핵 재배치 등 자충수 피하길
대북 압박, 국제적 지지 끌어내야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이를 남한의 핵 무장화로 선전·선동하면서 노리는 김 위원장의 내심과 대응 수순을 추론해보자. 첫째, 남북이 핵 무장한 마당에 북한 핵 폐기를 위한 비핵화 대화는 더는 의미가 없다. 그러니 북·미 핵 군축 협상을 요구한다. 배치된 주한 미군 핵을 카드로 활용해 대북 국제 제재를 일부 완화한다.

둘째, 북한이 압도적 대남 핵 우위에 서서 핵 공갈과 핵 위협을 지속한다. 주한 미군의 전술핵 배치로 남한은 원했던 미국의 핵우산 제공에 한결 든든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나, 이는 북한 보유 핵 무력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남한의 핵 무장을 빌미로 김 위원장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핵 무력 완성에 박차를 가하면서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 상황을 언제든지 조성할 능력을 갖추게 된다.

셋째, 통일 전쟁을 준비한다. 주한 미군의 존재가 눈엣가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과 양안 사태의 향방에 따라 미군 전력이 분산된다. 미·중·러 관계가 더 악화할 경우 압도적 핵 무력을 바탕으로 김 위원장은 일단 핵을 제외한 대남 전격전을 구사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김 위원장이 지금 대놓고 구사하는 연쇄 도발의 근저에는 완성했다는 핵 무력에 대한 자신감이 깔렸다.

그의 태도를 보면 예전과는 판이하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 비무장지대(DMZ) 목함지뢰 설치 및 대남 총격의 목적이 전쟁을 벌이자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의 목숨이 일순간에 위태로워지고, 북한 전역이 무너질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 김정은 위원장이었다.

핵 무력을 완성하지 못했던 과거에 그들이 노린 것은 시간이었다. 북한의 도발에 남한이 국가안보를 외치며 강경 대응을 천명하고, 한·미가 합세해 대응 군사훈련을 실행하면서 북쪽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면, 한반도 분단은 고착된다. 경제력이 남한의 수십 분의 1에 불과하고 한·미 군사력에 상대가 되지 않았던 시절에 김정일·김정은은 남한으로부터 어떠한 영향력도 차단하고 권력 유지, 핵 개발, 경제난 극복을 위한 시간을 벌고자 했다.

그 와중에도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같이 그들이 원하는 형태와 방법으로 달러를 벌려고 했다. 남한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이런 달러벌이 사업들이 막히기는 했으나, 아쉽지만 그것도 예상된 시나리오 안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윤 정부는 북한이 도발을 강화한다고 해서 우리가 가진 대북 지렛대를 스스로 단숨에 막고 잘라버린 과거 정부의 전철을 뒤따라 밟아서는 안 된다. 북한의 도발에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중단은 분명히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대응책이었다.

그러나 경제적 측면을 떠나 북한 주민에게 줄 수 있는, 두 사업이 갖는 대북 영향력을 고려할 때 일거에 폐쇄할 것이 아니었다. 북한의 도발을 명분으로 우리가 원하는 대북 사업이 될 수 있도록 국민과 국제사회가 지지할 수 있는 남북 교류협력이 되도록 만들어가야 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현금 이전을 북한 주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현물로 바꾸거나 사업의 축소 또는 변경, 그리고 안전보장 확보 등 많은 패를 우리가 쥐고 단계적으로 활용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북한이 7차 핵 실험 도발을 강행하면 자체 핵 무장에 대한 한국 사회의 목소리는 더 커질 것이다. 국민적 우려에 공감하면서도 윤 정부는 최후의 수단인 핵 무장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단계적인 정책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이를 통해 윤 정부는 대북 압박, 중국과 러시아 설득, 한국에 대한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지지 확보를 위한 동력으로 최대한 활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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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 전 통일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