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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동찬이 고발한다

서울서 사라졌다, 히잡 안 쓴 이란 선수…한국 정치 왜 입 닫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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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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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서울 용산구 이란 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엘나즈 레카비 선수 강제 귀국 의혹과 한국 시민의 시위. 오른쪽 위는 클라이밍 아시아선수권대회에 히잡을 착용하지 않고 출전한 레카비 선수. 그래픽=박경민 기자

지난 19일 서울 용산구 이란 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엘나즈 레카비 선수 강제 귀국 의혹과 한국 시민의 시위. 오른쪽 위는 클라이밍 아시아선수권대회에 히잡을 착용하지 않고 출전한 레카비 선수. 그래픽=박경민 기자

지난 16일 서울에서 열린 2022 국제스포츠클라이밍연맹(IFSC) 아시아선수권 대회에 이란 여성 선수 엘나즈 레카비가 히잡(이슬람권에서 여성의 머리카락을 가리는 스카프)을 쓰지 않은 채 출전했다. 때마침 이란 본국에서 여성들의 반(反) 히잡 시위에서 촉발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던 터라 이날 레카비의 선택은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과거 "스포츠 클라이밍 같은 격렬한 운동을 하면서 히잡을 쓰는 건 분명 핸디캡이지만 이란 선수로서는 감수해야 한다"고 인터뷰한 적도 있기에 이날의 행보는 더욱 파격적이었다. 특히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고 '도덕 경찰'에 끌려갔다가 의문사한 마흐사 아미니 사건 직후라 히잡 없이 경기에 임하는 레카비의 영상은 이란 내 SNS에서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히잡 반대 시위대는 그를 영웅으로 묘사할 정도였다.

레카비 선수를 언급한 이란 SNS들.

레카비 선수를 언급한 이란 SNS들.

히잡 착용 여부와 무관하게 애당초 이란에서는 레카비 같은 여성 스포츠 선수가 희귀한 존재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여성의 사회 활동을 크게 제약해온 탓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란에선 여성이 남성과 함께 경기를 관람하는 것조차 금기시돼왔다.

모두가 레카비의 다음 행보를 궁금해하던 차에 우려할만한 소식이 들려왔다. 영국 BBC의 페르시아어 방송 기자가 트위터를 통해 '서울 마포 가든호텔에 묵던 레카비가 휴대전화와 여권을 압수당한 채 예정보다 일찍 귀국길에 올랐다'고 전한 것이다.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이란의 반정부 성향 온라인매체 '이란 와이어'는 '레카비가 주한 이란 대사관을 통해 테헤란으로 보내졌으며 정치범을 수용하는 에빈교도소에 구금될 수도 있다'고 했다. 주한 이란 대사관은 즉각 이런 언론 보도를 부인했다. 예정대로 귀국길에 올랐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외부로 드러난 사실만 나열해보자면 서방 기자의 오해가 빚은 해프닝이다. 레카비는 지난 18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경기 도중 히잡이 실수로 벗겨졌다'고 해명했다. 또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도착한 테헤란 이맘 호메이니 공항을 가득 메운 환영 인파 속에서 레카비는 "갑자기 출전하게 돼 히잡 쓰는 걸 깜빡했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SNS와 조금 결이 다른 해명이긴 하지만 어쨌든 히잡을 일부러 안 쓴 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란에서 위험에 처할 거라는 서방 주요 언론들의 보도가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지난 19일 이란 국영TV에 등장한 엘나즈 레카비 선수. 히잡을 쓰지 않은 것은 단순한 실수였다고 말했다. EPA=연합뉴스

지난 19일 이란 국영TV에 등장한 엘나즈 레카비 선수. 히잡을 쓰지 않은 것은 단순한 실수였다고 말했다. EPA=연합뉴스

그런데 여기서 또 반전이 벌어졌다. 회견 후 누군가의 차를 타고 황급히 공항을 떠난 레카비가 다음날 다른 공식 석상에 똑같은 옷차림으로 나타난 것이다. 집에 가지 못하고 모처에 끌려갔다가 다시 동원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나오기 충분했다. BBC는 가택연금 상태라는 보도를 하기도 했다.

문득 이란이 핵 협상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국제사회 복귀 의지를 나타냈던 2014년 내가 직접 본 한 장면이 떠올랐다. 당시 이란 경제 제재 후 이란 진출에 대한 세미나를 서울에서 함께 개최했던 이란 출신 미국 변호사 바박 나마지는 축사를 하러 온 주한 이란 대사관 상무관을 한사코 피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박의 남동생이 불명확한 간첩 혐의로 구금됐는데 그런 아들을 구하겠다고 미국에서 이란으로 들어간 유니세프 직원이자, 미국 시민권자인 아버지(86)마저 구금됐고, 졸지에 바박은 인권운동가가 돼 아버지와 동생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고 한다. 다행히 아버지는 얼마 전 악명높은 에빈교도소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동생은 여전히 교도소에 있다고 한다. 이들 부자는 물론 미국 국제기구 등은 현재까지 스파이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이란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자면 이번 레카비의 해명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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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카비의 히잡 미착용을 둘러싼 논란을 차치하고, 이란처럼 여성의 히잡 착용이 의무인 나라에서 실수로 히잡을 안 쓴다는 게 가능한지 그것부터 한번 살펴보자. 2010년대에 테헤란에 교환학생으로 머물렀던 우리 로펌의 여성 이란어 패럴리걸(법률보조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외국인일지라도 히잡 없이 공공장소에 나가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고, 그게 워낙 습관으로 몸에 익다 보니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은 히잡 없이 밖에 나가는 게 어색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지금까지 줄곧 히잡 노이로제에 시달리는 이란 여성이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裏·사람들이 둘러싸고 봄)인 국제 경기 중 실수로 히잡을 깜빡하고 착용하지 않는다고? 차라리 레카비가 소동 후 처음 SNS에 올렸듯이 이란 당국이 '실수로 벗겨졌다'는 쪽으로 일관되게 밀었다면 보다 신빙성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이란 내에서도 비슷한 분위기인 모양이다. 이런 현지의 모 여성 언론인은 SNS 메시지를 통해 '레카비가 여러 압력으로 사실과 다르게 변명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19일 자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1면에 실린 레카비 선수 조기 귀국 의혹 사건.

19일 자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1면에 실린 레카비 선수 조기 귀국 의혹 사건.

히잡을 둘러싼 소동의 진실과 무관하게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바로 우리 정부의 침묵이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논란의 시작이 바로 대한민국 서울이 아니던가.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운동선수가 여성을 억압하는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제 귀국 당했다는 영국 공영방송 BBC 등 주요 외신 보도가 이어졌지만 이 시기 열렸던 국정감사 중에 외교부 장관에게 선수의 안전과 관련한 질문을 한 의원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21세기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서도 일어났을지도 모를 외국 운동선수의 강제 귀국 사태에 대해 약속이나 한 듯 정부와 여야 정치인 모두 입을 닫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안타까움도 사실 레카비 선수의 안전을 고려하면 부차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는 과연 자유의지로 말을 할 수 있는 상태일까. 과거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중국 테니스 스타 펑솨이는 SNS를 통해 권력자인 장가오리 전 중국 국무원 상무 부총리와 불륜 관계였음을 폭로하자마자 행방이 묘연해졌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와 국제 여자 테니스 연맹은 즉각적으로 선수의 안전을 확인하고자 노력했다. 국제클라이밍연맹도 레카비 선수의 안전을 확인하고자 노력 중이라니 그나마 다행인듯싶다.

레카비가 깜박 잊고 히잡을 쓰지 않았든, 그가 자국에서 번지고 있는 히잡 반대 시위를 응원하기 위해 일부러 히잡을 벗고 경기에 임했든 그 경위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자유롭고 안전하게 지내다가 다음번 국제스포츠클라이밍 경기에 나와 열심히 클라이밍을 하는 모습을 전 세계 팬들에게 하루빨리 보여줄 수 있기를 소망할 따름이다.